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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ueprint(블루 프린트) 리뷰
    책/외국소설 2014. 9. 15. 09:15

     


    블루 프린트

    저자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출판사
    다른우리 | 2002-12-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동물 사육사는 자신이 사육하고 있는 동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청사진'은 긍정적인 미래상을 떠올리게 한다. 복제인간이라는 조금은 '딱딱한'용어 대신에 '블루프린트'라고 자신에게 이름을 붙인건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위함인것 같다. 책을 읽다 보니까 안타깝게도 블루 프린트라고 할만큼 책 내용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작가가 이 소설에서 취한 '서술 방식'이 너무나도 개인의 정서 흐름위주로 가다보니까, 어느 순간에는 거리를 두기가 힘들어지고 두쪽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애매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한명의 주인공에게 완전한 감정이입을 하고 다른 한명을 바라보는 식이었다면 좀 더 읽어가는 과정이 편했을텐데 그렇지 않았다. 어쨋거나,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있는 키워드는 가장 핵심인 '복제'이다. 단순히 '복제'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고 보면 너무 크니, 이리스(엄마)의 입장과 시리(딸)의 입장으로 나눠서 이야기를 하는 게 좀 더 현명한 것 같다. 그리고 서사구조의 측면과 '성장소설'이 가지는 성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잠깐 제목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자면, 블루프린트 그러니까 청사진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이미지를 지닌다. 이리스에게는 시리가 피아노를 열심히 치는 것(자신의 삶을 이어받는)이 블루프린트였을 수 있고, 시리의 경우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는 것이 블루프린트일것 같다. 하지만 피셔박사의 아들에게는 다른 '블루프린트'가 존재하지 않아 보였다는 점에서 어떤 성장 환경을 제공하느냐도 상당히 중요함을 알 수 있었으며, 사람들이 이리스와 시리 모녀를 두고서는 굉장히 복잡적인 감정들을 드러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을 복제한 '아기'는 블루프린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1. 이리스와 시리

     

      혹시나 해서 '이리스'라는 이름을 쓴데에 이유가 있는지 좀 찾았지만 딱히 없는 것 같다. 이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중 한명인데,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결혼을 한 사이이고 카두케오스(케리케리온이라고도 부르는데, 헤르메스가 들고다니는 지팡이를 말한다.)를 들고다니며 헤르메스와 비슷한 '전령'역할을 하는 신이다. 그녀는 지하세계부터 신들의 공간까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행자'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신 '이리스'와 피아니스트 '이리스'는 전혀 관계가 없다. 어떠한 점도 '신'으로서의 이리스와는 연관점이 없었다.

      이리스는 피아니스트이다. 그녀는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증세를 겪기 전까지만 해도 복제아기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리스가 다발성 경화증-이 자체로는 죽는 게 아니지만, 합병증이 너무나도 심해져서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 이 병의 핵심이다-을 겪고 난 뒤에 이 생각이 바뀌면서, 자신을 잃고 싶지 않은 욕망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수명 연장'의 기회를 이리스는 자신의 복제아기를 낳는 것으로 찾는 것이다. 고칠 수 없기에 자신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리스는 이 부분에서 자연의 원리를 거슬렀다. 나는 자연의 원리를 최고로 여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렇게 세대를 연장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불확실성'이 '제한된 확실성'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번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DNA가 같은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는 것은 금방일 것이고 이는 전염병에 매우 취약한 메커니즘을 확대시키는 꼴이 된다. 자연수정은 이러한 취약점을 극복하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라고 알아왔다.(붉은 여왕과 같은 책을 통해서) 하지만 이런식의 체세포 복제는 그 어떠한 DNA의 변화점 없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다. 만약 이러한 방법이 개선이 된다고 해도(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DNA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간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들은 인간보다 더한 진화를 통해서 이에 대항해왔다. 그 예가 바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라고 볼 수 있는데, 항생제에 반응하며 사라지는 박테리아도 있지만 이런것들을 이겨내는 박테리아가 지속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인플루엔자가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DNA가 같은 사람들이 계속 생겨날 것을 생각하면 피셔박사의 실험이자 이리스의 욕망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난 이런 부분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이런 이리스와 피셔의 행동은 좀처럼 납득할 수 없었다. 기술적으로 복제가 가능하더라도 아이의 건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너무나도 계획된 삶 아래에서 아이를 키워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자신과 DNA가 일치하기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자신의 딸도 선호할 것이라는 걸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일들을 일으킬지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안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리스가 크리스티안에게 호감을 느끼면 시리 역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더 뼈저리게 알아야 했는데도 너무 무관심했다. 기본적으로 아이를 예측할 수 없는 '아이'로서 생각하고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리는 자신의 통제 아래에 있다고 생각했던게 일련의 사건(크리스티안을 좋아하게 되는 것, 야네와 늦게까지 놀다 들어오는 것 등)들을 키워온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수명 연장을 (적어도 지금의 나이까지는)바라지 않고 있다. 약 70세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내가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아래에 살고 싶다. 왜냐하면, 과연 내가 그때 삶을 즐길 수 있을만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것과, 나이를 먹어도 죽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살아있다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회적 비용이 더 지출되고 이로 인해 아직 삶이 많이 남아있는 젊은 사람과의 갈등을 빚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분명 사회는 점점 고연령층을 배려하는 정책을 펴주긴 하겠지만 과연 그것으로 혜택받는 '자신'이 되어있을때 기쁠지 나쁠지 모르겠다. 나이를 먹었으니 당연하다고 느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고 나니 이런 생각은 좀 특이한 편인것 같다. 대부분은 이리스처럼 '연장'을 하고 싶어한다. 죽지 않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연장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설사 내가 생각이 바뀌어 수명연장을 하고 싶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사람을 한명 더 만들어내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내가 과거의 기억을 안고 다시 태어난다면 해볼만 할 것 같다. 내가 이전에 겪으면서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기회를 가져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리스와 시리처럼 동시대에 살아간다는 것은 어른으로 하여금 아이를 이해 하는 듯 한 착각을 줄 것이다. 이리스 역시 시리를 이해하는 듯 했지만 시리의 마음속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부감'이 싹트고 있었다. 시리가 이리스인척 하며 병원에 가서 자신의 할머니를 병문안 하는 장면, 다른사람이 시리를 이리스로 착각하고(외양이 같기 때문에) 사인을 요구하는 장면, 크리스티안이 착각해서 키스를 했던 장면 등은 인간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 시리의 어린시절 속의 불안정

      시리의 편을 들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피해자라고 하지만 그녀가 자행한 수많은 '복수'형태의 행동들은 갈등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너무 어린아이에게 많은걸 요구하는 것 같기도 한데, 사람이 문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입장은 시리처럼 '복수'만 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를 거울로 삼으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는 방법도 있다. 뭐, 이리스나 시리나 반항하고 대적하는 유전자였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시리의 불안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그녀가 너무나도 '선택권'을 박탈당한채 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리의 삶을 조금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었던 어린시절과 대비했을때, 책에 있는 내용대로 '이리스'가 죽음으로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는 측면이 '이리스'와는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분명 이리스가 죽기전까지 그녀의 삶은 '그녀'의 온전한 삶이라고 말하기 너무 힘들었다. 그녀가 어린시절부터 이리스의 교육법(시리를 대하는 태도 ; 좀 더 광범위하게 생각하면 그렇다.)으로 인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이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예를 들면 이리스가 아파서 자리를 비우는동안 생기는 자아 개념의 혼란('나는 너, 너는 나'가 적용되지 못하는 상황), 자신의 공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이리스를 바라보며 자주 자리를 비우는 '엄마'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주위에 대한 불안감은 시리가 상당히 불안한 감정을 자주 느꼈다는 걸 의미한다. 이런 불안감 속에서 아이가 자라났는데 정상적으로 자라나게된 시리의 어른모습을 그렸다면 굉장히 어색했을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전개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두번째 문제점은 '아버지'의 부재이다. 최근까지도 많은 연구자들이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내가 연구자가 아니라서 아버지가 왜 중요하다고 딱 정의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어머니와는 또 다른 '안정'을 주는 공간으로서 아이들에게 자리하는 것 같다. 내 성장과정속에서는 안타깝게도, '유일한 남성성'인 아버지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적다. 아직까지도 어떻게 나의 남성성이 어떤부분인지,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중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있는 사람도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고 문제점을 겪고 있는데 오죽하면 시리에게는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피셔박사의 손을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였으면 하고 바란건 단순히 '손'이 피아니스트를 하기에 적절할 것 같아서를 넘어서 아버지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사랑'을 생각했던게 아닌가 싶다. 시리는 학교에서 아버지를 써야하는 칸에 '아버지'가 없다고 적는 그 순간에도 공허함을 느꼈다. 또한 거의 '혼자'였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야네'가 친오빠처럼 옆에 있으면서 안정감을 주었던 점은 마른 하늘에 단비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시리에게 필요한 건 좀 더 안정적인 사람이었다고 본다. 이리스와는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이리스는 '시리'를 자신의 '목적'이자 '미래'로 바라보았지만 시리가 원하는 건 그런게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관심과 사랑이었다.

     

     

    2. 구조적인 부분

     

    - 시리의 서술 -

      시리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는 점은 읽는 과정 속에서 제한점을 걸었다. 작가의 의도이긴 하지만 '이리스'의 진정한 내면을 알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너무 아쉬웠다. 처음부터 시리가 자신은 '잘못된 탄생'이었다고 생각하며 내뱉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공평하게 둘을 바라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러한 복제는 잘못되었어!'라고 외치는 작가의 소리가 들리는 시리 일변도 서술은 시리가 이리스의 '피해자'라는 시각을 갖게 만든다. 공정하게 둘을 바라보고 싶어도 불가능하고 이러한 관점은 작가의 의도와 매우 밀접한 부분이다. 그래서 나도 내 생각을 투영하며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좀 심했던것 같다. 단순하게 시리가 불쌍하다고만 말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복잡하다. '복제된 인간'이 계획 아래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것 같다. 분명한건 복제된 인간 역시 다발성 경화증을 겪으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어야 했는데 엄마인 이리스가 이걸 원천봉쇄 하는 측면이 너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리스가 순수하게 자신의 재능을 또다른 생명으로 연장하여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려했던것이라면, 그녀의 음악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괜찮은' 제안일 수도 있겠지만, 시리의 시각에서는 이리스의 순수한 목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또 이리스의 가정교육 실패가 번번히 드러났다고 해야할까, 너무나도 빈틈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빈틈을 시리는 더 잘 잡아낸것 같다. 크리스티안을 너무나도 자주 집에 데려오는 것이나, 아이가 자신의 어린시절처럼 '화려한 옷'으로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던 행동들을 이리스는 좀 더 잘 잡아내 대처했어야 했다.

     

      - 성장소설의 측면

      어쨌든, 이 이야기는 시리가 자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시리의 시점과 현실간의 연령차가 좁혀지면서 좀 더 사실적인 기억들로 가득차던걸 느낄 수 있었다. 전반에서는 시리가 자신의 감정과 느낌 위주의 서술을 보였다면 후반부로 갈 수록 구체적인 기억들이 밑바탕 되어있었다고 해야할까, 시리가 자라나면서 초기에는 반항적인 모습만 보이다가 이리스의 삶이 끝에 다다르면서 다시 그녀를 찾아가는 모습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장송곡을 끝으로 음악을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하는 모습들은 결국 시리가 자라나는 이야기를 써낸것과 같다. 그래서 성장소설이라고 하는지 조금은 깊이 다가왔다. 

     

     

    3. 글을 마치며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했다. 과연 이리스의 경우처럼 확실한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단지 자신이 원하는 아이가 '복제아기'일때는 가치판단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불의의 교통사고로 자식을 잃기 직전인 부모가 자식의 체세포를 이용해 같은 아이를 다시 임신했을 때 등등 참 말로 하기 애매한 문제들이 이 '복제'라는 범주에 들어갔다. 카톨릭 신자지만 수정된 세포 상태를 두고서 '생명이 있는 존재'라고 하기에는 좀 어렵지 않나 싶다. 물론 군대 양성을 위한 체세포의 복제 이런건 말할것도 없이 반대이다.(전쟁 같은 건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는걸 여실히 깨달았다. 다 읽고 나니 쿠르베가 그린 '세상의 기원'-누워있는 여자의 성기를 그린 그림-이라는 그림과 이 세상의 기원이라는 그림을 패러디한 전쟁의 기원-누워있는 남자의 성기를 그린 그림-이 떠올랐다. 지금 사회는 내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이룰 수 있는 상황인 것 같다. 극히 비도덕적인것들만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이룰 수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치판단이 애매한 것들이 '경제적 이해관계'로 실행되는 행동들의 시작점이 바로 '복제인간'과 관련된 부분이 아닌가 싶다. 식물에 대한 복제와 유전자 조작이 오래전부터 이루어져있었지만, 아직 인간에게까지 활발한 상황은 아니지만, 수년 안에 일이 터질것이라고 본다. 굳이 터진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사회에서 나타날 수많은 파급효과들을 생각해보니 '터진다'라는 말 외에는 달리 적합한 표현이 없었다.

     

      계획된 탄생에 대해 내가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었기때문에 나는 시리에게 공감하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그녀가 성장과정속에서 숱한 불안감을 느꼈다는것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부분에서 내게 시사점을 준 책이 되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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