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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숙, '외딴 방',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책/한국문학 2016. 7. 10. 12:07


    -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책을 읽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글이니 책을 읽어보실 것을 강력히 권유합니다.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한국 현대사를 배웠다면 접해볼 수 있는 사건들이 녹아있지만 그 사건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기도 합니다. 또한 서술 방식이 독특하다는 점에서 2가지 지점이 모더니즘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의 색채가 나타났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0.

     서술자는(작가는) 말했다. 이 작품은 사실과 픽션 그 중간쯤의 어디에 위치하는 글일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는 그리고 첫 페이지, 그러니까 책을 바치는 글에는 최이홍 선생님과 산업체 특별학교, 과거가 될 수 없는 희재 언니를 언급했다. 예전에 이상의 '날개'를 읽으면서 '아포리즘'이 있다는 걸 어떤 형이 알려줘서 알았었는데, 이 작품 역시 이런 아포리즘이 들어가 있었던 거구나 싶다. 작품의 내용을 묘하게 제시해주는 문구는 작품 전반에 대해서 '픽션'인지 '사실'인지 헷갈리게 만들면서 이야기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픽션이기도 하다. 사실대로 적기 싫어서 픽션으로 적었지만 왜 사실대로 적지 않았냐는 사람들의 말에 과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 지 모르겠다.

     '외딴 방'을 처음 접했던 건 고3때 평가원 모의고사를 통해서였다. 그 때 당시 작품 수록 부분은 정말 인상깊었다. '소설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는 내용과,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공'을 필사하던 내용, 최이홍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가 지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그 지문은 인상적이다. '작가'로만 보면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는 작가이지만, 실상 이게 수능시험을 예비하는 모의 평가에 나올만한 것인지는 의문이었는데, '난쏘공'이라는 친숙한 소재가 그걸 더 가깝게 만들어주면서 생소하지만 생소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지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게 돌고 돌아서 임고에 또 나왔으니 정말 중요한 작품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읽었고, 나는 이 작품에 대해서 정말 특별하고 중요한 작품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난 이 작가의 위작 논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가 위작을 한 작품에 대해서는 시인을 하지 않았지만, 내 관점에서도 너무 표절 같아서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신경숙 작가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이 '외딴 방'은 '엄마를 부탁해'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고 난 뒤에 읽어서 그런지 이야기들이 통합되는(학습 내용이 연결되는 건 언제 해봐도 좋은 성공경험이다.) 느낌을 받아서 사실상 위작 판정 받은 작품과는 별개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외딴 방'을 두고서 누군가는 메타 픽션이라서 개인의 표현이 상당히 강하게 남겨져 있는 작품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또 다른 연구자는 이 작품을 두고서 1990년대의 리얼리즘 소설이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권위있는 자의 평가를 떠나서 내 주관적인 생각에도 이 작품 자체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런식으로 시대의 이야기를 녹여낸 소설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구조, 소재, 서술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1. 구조

     작품은 총 4장, 시간대는 '두 개'다. 병렬식 구성? 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글을 쓰고 있는, '작가가 된 나'의 시점 하나랑, 열여섯부터 시작하는 '과거의 나', 이렇게 2개가 존재한다. 회상처럼 보이지만 회상으로 연결하기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왔다갔다 한다. 물론 열여섯, 열일곱의 나의 이야기가 훨씬 많이 등장하고, 그 이야기에 희재 언니 이야기도 있으니까 액자식 구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만큼 액자식 구성이라는 말이 딱히 필요하지 않은 소설도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과거의 이야기도 중요하고 현재의 이야기도 중요하게 나타난다. 또한 두 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주인공을 연결되어 있어서 구분해도 완전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희재 언니의 이야기는 1장에서 거의 나오지 않다가 2장부터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서술자는 시골에서 나의 생을 찾으러 도시에 온 열여섯의 '나'를 과거로 끌어들인다. 이 작품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다. 과거와 현재의 넘나듬 속에서 열여섯의 나는 가리봉동에 살며 잠시 시골의 집에 왔다가기도 한다. 공장에 다니다가 산업체 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를 다니며 최이홍 선생님을 만나 글을 쓰기 시작하는 이야기,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이야기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수 많은 기록들이 담겨져 있다. 518도 있고, YH여공사건도 있다. 정말 다사다난한 한국의 현대사는 '소시민'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노동자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열여섯이 나는 '노동자'였으며 이 노동자가 희재언니의 죽음을 겪게 되고 이후 가리봉동의 외딴 방에서 이사하는 내용이 한 축이며, 한 편으로는 나이가 들어 '작가 생활'을 하고 있는 '나'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과거 '노동자'였던 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장 하나하나가 각각 연재되었었기(총 4장) 때문에 각 장은 내용의 구분이 있지만 사실 그 구분이 강하지는 않다. 단지 이야기가 하나하나 넘어가는 정도이다. 이런 연재소설들을 읽은 것 중에서 기억나는 작품을 고르라면 '무정', '삼대', '천변풍경'과 같은 것들을 고를텐데 '무정'이나 '삼대'는 서사성이 강했어서 읽는 동안 긴장하면서 읽었고, '천변풍경'은 풍경이 달라지기 때문에 편하게 읽었는데 '외딴 방'은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었다. 그냥 넘어가기에는 뭔가 하려는 이야기가 남아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서사의 연결이 매우 끈끈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이런 부분은 서사가 없는 '모더니즘'을 떠올리게 하지만, 만약 정말 서술자가 의도하는 이 '외딴 방'이라는 글의 내용이 일상의 작은 기쁨이나 슬픔 등 '작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내용의 연결은 그렇게 강력하지 않아도 그리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내가 전에 보지 못한 구조도 내용을 읽다보면 납득이 갔다. 나도 어떤 감정을 이야기하거나 글로 적을 때 그 감정이 강하게 '서사화'되어 나타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 부분을 작가는 고민한 게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 그건 '서술자'가 말하는 사실대로 쓰는 것에 있을 것인데, 어느 한 선배의 충고대로 '사실대로 쓰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있는 서술자이기에 전달하는 방법이 일반적인 '이야기 소설'들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은걸까 하고 혼자 생각해봤다.


    2. 소재

     음, 주인공들은 '소시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소시민은 난쏘공이 말하는 소시민과는 다르다. 난쏘공의 소시민들은 대개 사회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아버지는 산업화의 과정속에서 마땅한 직장이 없지만 부양해야하는 자녀들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여동생은 그렇게 가족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속에서 '가출하는 청소년'을 나타내고 있따. 그 외에도 자살하는 사람들이나 분양권을 사가는 사람 등 조금씩조금씩 그 당시의 사회문제가 인물을 통해서 '간접화'되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외딴 방'의 나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려는 것 보다 그 안에서 있었던 소소한 기쁨, 일상, 고민, 슬픔 등이 더 초점에 맞추어져 있는 것 같다. 뭐, 사람들에 따라서는 이 작품을 메타픽션이라고 이야기하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편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단지 작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술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냐면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소설 속의 나이든 '나'는 과거를 회상하되 과거를 진술함에 있어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같이 진술하고, 그러한 서술자가 이야기하는 그 '기본적인 내용'은 일상의 기쁨과 고민, 슬픔에 있었다. 또한 이게 완전히 '사실'일 수 있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그 누구도 이건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재구성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 물론 소설 속에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518도 있고, YH여공사건도 있다. 또한 산업체 특별학교에 다녔던 이야기도 담겨있고, 공장 안에서 노동조합이 생기던 일들도 담겨져있다. 정말 하나하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하지만 사소할 수도 있는,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사건들이 담겨져있다. 그러니까 여전히 '소재'에서는 아주 강한 현실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소설이던지 그 현실성은 '소설'을 이루는 반쪽과 같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다. 사실 같은 허구가 소설의 목표가 아니던가,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실제 삶이 소재로 들어가기는 했음에도 결국 이 이야기는 '허구'인 것이다. 그러나 '희재 언니'의 죽음이 허구인가에 대해서는 왠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실대로 썼을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서, 희재 언니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개인의 체험', 음..얼마전에 조금씩 자료를 읽기 시작하게 된 '안수길'의 경우도 그의 만주 체험이 '북간도'라는 대작을 쓰게 만든 원동력이었고, 이광수 또한 자신의 삶에서 겪은 많은 문제(고아, 동학)들이 삶에 녹아들어갔다. 또한 김동인도 자신의 짧지만 감옥에서의 생활을 태형과 같은 작품으로 표현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만큼 '소재'라는 측면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두 개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데 어찌 다른 소재를 확 끌어올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렇게 하면 현실성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소설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작가의 삶은 소중한 소재이며 그걸 얼마나 '허구성'을 가미해서 표현해내는 점이 그들의 능력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사실과 픽션'그 중간쯤의 어디에 위치한다는 물음과 답변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작품의 위치를 '서술자'가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소재는 나이가 들어있는 '나'의 삶이다. 작가가 되어있는 '나'의 삶, 자신이 보낼 글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이 묘한 방법은 작품 속에 작품이 들어있는 '병신과 머저리'가 떠오른다. 그러나 두 개의 이야기가 '서술자'가 아닌 형의 이야기와 형과 나의 이야기로 요약되었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 어쨌든 두 개의 이야기 주체는 모두 '나'이고 과걸르 바라보는 것도 '나'이다. 그래서 시대를 왔다갔다가해도 이야기가 연결되었던게 아닐까 생각한다.


    3. 서술방식

     이 작품의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아마도 가장 큰 특징은 종결어미에 있다고 생각한다. 뭐 한국어의 특징이기도 한데, 그러니까 문장의 서술어가 시점과 서법을 나타내다 보니까 유독 중요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작가가 다양한 형태로 서술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과거형 어미를 썼다가 현재형 어미를 썼다가, 열여섯, 열일곱의 이야기는 '현재형'으로 쓰이는데 막상 나이든 '나'의 이야기는 과거형으로 또 쓰인다. 하지만 이게 고정적인게 아니라서 현재형과 과거형은 왔다갔다 한다. 어느때는 현재형으로 어느때는 과거형으로. '나이든 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쓰는 건 마치 생각나는대로 쓰는 기분을 주면서 현실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서술의 일관성이 떨어지고 '시간'의 개념이 약화되는 단점이 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을 통해 '보편적인 회상'의 방식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회상이라는 장치는 다소 상투적이고 틀에 박힌 방식일 수 있지만 작가는 '회상'과 현실을 이야기하는 그 어딘가의 중간쯤에서 내용을 녹여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소설?이랄까, 그래서 나는 이걸 뭔가 '모더니즘'적인 또 다른 실험의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게만 보는 것은 아닌가보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열여섯의 '나'가 가리봉동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작가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이 이야기가 따로 돌아가지만 결국 하나라는 점에서 현재형과 과거형의 어미는 의미가 없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대로 쓰려고 한 서술자의 이야기가 그와 같이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기도 하다.


    4. 그 외 개인적인 평가

     나는 이 작품이 정말 좋았다. '외딴 방'이 처음 내게로 온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의 모의평가였지만, 그 순간 이후에도 잊혀지지 않고 머릿속에 남아있어서 좋았다. 시험날 이 작품을 읽으며 묘한 감정, 느낌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 느낌을 이번에 전체를 읽으면서 새롭게 경험했기 때문에 의미있는 작품이 되었다. 시작은 이랬었다.

     글을 읽다보면서 생각이 나는 것들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일상의 행복, 기쁨, 슬픔은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감정들이다. 하지만 지나치기 쉽다고 해서 가볍지만은 않다. 그것들이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을 차지한다. 그래서 자꾸 일상에서 오는 행복을 감사하게 여기라는 책도 나오고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방법에 관한 책들도 나오는 것이다. 이걸 깨달으면 삶이 조금은 행복하고 편해지는 것도 있다. 요즘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고, 작년 1월 이후에는 대개 그러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니 그 전의 삶들도 떠오르고 최근에 삶들도 떠오르니까 교차되는 기억들이 많아서 감정이 묘했다. 기쁨과 슬픔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내 마음을 나는 바라보고 달래기도 하고 같이 웃기도 했다.

     또 하나 연결지을 수 있는 부분은 이 소설의 곳곳에 '외딴 방'이후에 나오는 신경숙 작품의 흔적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나, '엄마를 부탁해'와 같은 작품들의 이야기가 조금씩 녹아있었다고 하면 그건 너무 심한 말일까,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야기들을 조금씩 발견했었다. 자꾸 전화벨이 울려 전화선을 뽑아버렸다는 서술자의 이야기와, 오빠의 생일을 위해서 서울의 그 '외딴 방'으로 생닭을 사들고 오신 '엄마'의 모습, 그리고 '나'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며칠은 집에만 계셨다는 '아빠'의 모습에서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중에서 잠시 '고향'에 다녀오며 느끼는 서술자가 느끼는 감정에서 당시 시대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은 참 묘하게 다가온다. '나'는 외사촌과 같이 고향집에 다녀온다. 이때 '서술자'가 느끼는 고향은 풍성하고 넓고 모든 게 다 있는 공간이다. 고향이서는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올라와서 '외딴 방'에서 사는 '나'와 외사촌, 셋째 오빠와 첫째 오빠가 사는 것은 어려운 건지 느끼는 부분에서 일상성이 나타났다고 느꼈다.

     나에게도 외딴 방은 있다. 요즘 사는 곳이 외딴 방이라고 하면 외딴 방이겠지, 음 아닌가, 영국에서의 그 방이 외딴 방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그 '방'부터 최근의 방은 공간의 연속성이 없어도 분위기의 연속성은 남아있다. 그래서 이 소설에 공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결코 밝은 소설이 아님에도 내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외딴 방'이 그러했고,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상성을 표현하려는 서술자의 의도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떠오르기도 한다. 현재의 감각으로 과거를 되살려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비슷한 느낌이 든다.


     여담이지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6월 26일인데 이 글을 마치는 오늘이 이미 7월의 1/3이 되었음을 보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아마도 이 작품에 대해서 부여한 나만의 의미가 나름대로는 많은 데 그걸 정리까지 하려니까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쓸 때도 만족스럽지 않은 내용들을 두고서 바로 발행을 누를 수 없는 것이 내 필자 의식이니까 말이다. 적어도 나는 어느정도 만족할 수 있어야 글을 마칠 것 같은데 영 마음에 안드니 써놓고 멈추고 지우고 다시 쓰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나도 고민했다. 과연 글쓰기란 도대체 무엇인지 고민을 하곤 했다. 글쓰기는 결국 자기 표현의 과정이고 정리의 과정이 아닐까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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