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영화 '미녀와 야수'를 인생 처음으로 보고
    영화 2017. 4. 7. 11:31

    -1. 들어가기에 앞서.

    어린 시절에, 케이블 TV의 보급률이 매우 낮았었던 때로 기억한다.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96년, 95년도 즈음이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으나, 나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집에 케이블 TV 셋톱박스가 있었어서 하루 종일 투니버스와 같은 만화 채널로 만화의 풍족함을 누렸었다. 덕분에 '디즈니 만화동산'과 같은 만화에는 흥미를 가진 기억이 없다. 혹자는 알지도 모르겠지만, 무적용사 라이징오와 같은 용자왕 시리즈의 만화들을 그 당시 투니버스에서 해줬었고, 나는 그것들을 열심히 봤다. 그러다보니 디즈니 에니메이션에 대해서 아는 것들이 몇 없다. 내가 기것해서 아는 건 '토이스토리'와 '알라딘'뿐이다. 제대로 에니메이션 영화를 본 것은 저 두 편 뿐이라는 말이다. 라이언 킹도 제대로 보지 않았고, 타잔도 보지 않았다. 그러니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만화가지고 대화가 될 리가 있나.

    '미녀와 야수'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나는 26세의 올해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접했다. 물론 뭐 대충 '제목'만 봐도 '야수'가 미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게 결국 '야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고는 추론 할 수 있지만, 도대체 구체적으로 왜 야수가 된 것인지, '미녀'는 왜 '미녀'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번 영화를 통해서 그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본디 대세를 따라가는 영화, 그러니까 유행으로 보는 영화 자체를 피하려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 성향과는 맞지 않는 영화인데, 친척 동생들과 같이 영화를 보려고 하다 보니 이 영화를 보았다. 이번 글의 주제는 '성장 환경, 조력자, 공감대, 자유'다. 아마도,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은 대개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내용에 영화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는 것을 미리 알린다.


    1. 성장 환경

    1) 어머니가 일찍 죽는 환경 / 아버지의 교육

    벨 마드모아젤과 야수는 비슷한 성장환경을 지녔다. 둘 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 물론 그 시점은 다르지만. 그리고 '아버지'의 밑에서만 자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매우 다르다. 벨은 '책'을 읽는 여자로 자라난다. 벨의 아버지 말대로, 벨은 마을 사람들에게서 '이상하다'(odd)라는 평을 듣지만, 이를 고민하는 벨에게, '좁은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생각도 좁다'고 말한다. 파리에서의 삶, 글자를 읽을 줄 아는 벨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몇 안되는 '지식인'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벨의 집안이 조금 다른 분위기의 집안임을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야수'는 어떠한가 살펴보면, 차가운 아버지 밑에서 어머니를 일찍 여읜것으로 드러나있다. 어머니를 잃고 난 뒤의 야수는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지 못한 것이다. 연회 중 들어온 노파가 '장미'를 내밀었지만 그 노파를 내보내려고 하게 되면서 얻은 '저주'를 통해서, 겉모습만 보고 사람들을 판단하였던 야수의 과거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연회의 모습도 상당히 향락적이다. 지나칠 정도의 사치와 화려함이 연회에서 보였었다.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수 많은 여자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상황을 제시한 것은 그 부분을 통해서 왕자의 과거를 드러내고 비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왕자는 아버지 까지 여의었고, 벨은 아버지가 있었다는 점이다. 벨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점은 여전히 어머니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줄 사람이 있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는 '아버지의 품'안에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하지만 벨이 '성'에 갇혀서 부르는 노랫말 속에서 자신이 이제까지 생각했던 세계와는 너무 다르고, '자유'란 어떤 것인지 고민해본다는 점에서 야수의 성장환경이었던 '성'은 벨이 성장하는 또 다른 공간으로서 드러난다. 아버지가 없는 공간으로서 '성'이 있고, 그 성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하는 공간이 아니라, 모든 일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이 사치의 공간이었다가 나중에는 잊혀진 공간으로, 그 다음에는 성장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이야기 마지막에는 화합의 공간이다.


    2) 글자

    벨과 마을 사람들이 '차별'되는 지점은 몇 가지 있다. 외형적으로는 옷의 색이 다르다. 파란색은 아무도 입지 않는 색이다. 이 파란색을 입고 있는 사람은 '야수'뿐이다. 나머지는 다 흰색이나 분홍색, 빨간색, 그리고 톤이 낮은 칙칙한 색을 입고 나타난다. 이러한 외형적인 분위기말고도, 벨은 '글'을 읽을 수 있다. 글을 읽는다는 점은 이 말을에서 매우 '차별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남자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며 글을 배우지만, 여자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아는 '벨'을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긴다. 얼마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지는 글을 가르쳐주려는 '벨'의 빨래를 길거리에 내던져 버리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서양에서도 똑같겠지만 상류층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개스톤을 유혹하는 매춘부들이 글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읽은 덕택에 야수와 대화를 틀 수 있게 된다는 점 또한 특이한 부분이다. 만약 글을 읽지 못했으면 셰익스피어의 책 내용을 이야기 했겠으며, 야수의 성 안에 있는 책방에 흥미를 보였겠는가, 즉 글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는 것을 간단하지만 중요하게 드러낸 부분이다. 즉 여기에는 일정 정도는 사회 내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여자는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을 담고 있고, 벨은 이를 거부하는 주인공으로 드러난다.


    3) 마을 : '좁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생각도 좁다.'

    '벨'을 두고서 이상하다고 하는 말 속에는 벨과 같은 글을 읽는 여자애들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넓고 다양한 생각이 있는 공간으로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뭐 오늘날에도 비슷하다. '파리'하면 자유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뭔가 실제로도 더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벨의 마을은 보기에도 작고, 벨이 생각하는 만큼의 '자유'도 찾기가 어렵다. 그가 원하는 '글'도 많이 없는 곳이라서 기것해야 있는 책은 마을에 10권이 넘지 않는다. 아무도 글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러다보니 마을의 수준이나 변화 가능성은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의 생각은 좁을 수 밖에 없다.

    다만 내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부분은, '벨'이 원하는 '자유로움'이란 것은 자신을 받아들여주고, 자신에게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는 마을의 분위기를 말하는 듯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성'은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가 '없는 곳'이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곳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그래서 벨이 야수와 사랑에 빠지고 사람들이 기억을 되찾아 저주에서 풀렸다고 할 지라도, 사람들이 '벨'이라는 여자를 이상하게 여긴다는 사실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좁은 마을에서 벗어나 더 넓은 공간으로 갔다고는 보기가 힘들다. 이 부분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디즈니 영화에 이런 부분까지 이야기를 하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주인공인 벨은 그것을 벗어나려고 했던 점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지는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서 더 큰 공간(유일하게 드러나는 큰 공간으로는 파리가 있었다)으로 가는 것도 하나의 방향이었을텐데, 사랑 때문에 더 큰 공간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는 점이 조금 아쉽게 다가왔다. 정해진 전개에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구조였을까 하는 아쉬움이 좀 있었다.

     

    2. 소재

    - 책이라는 소재 - 대화 통로(셰익스피어)

    두 주인공의 대화 시작은 셰익스피어에서 시작한다. 사실 영어권 영화의 셰익스피어 사랑은 어마어마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좋아하는 벨에게는 성 안에 있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서 자신의 심심함을 달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벨이 마을에서 '혼자'다니면서 '이상한'(odd)이라는 표현을 듣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책을 읽는 것'인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고,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을의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에 책을 읽을 줄 아는 '야수'에 대해서 흥미가 가게 된다.

    책'은 곧 둘만의 대화 통로가 되는 것이니 이후 둘 사이에서 대화가 좀 더 많아질 것이라는 건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내용상으로도 둘은 성 앞의 정원을 거닐면서 벨의 책 읽기를 옆에서 야수가 들어주며, 그간 해소하지 못했던 '지적 욕구'를 갇힌 공간인 성에서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책'이라는 연결고리가 없었으면 둘은 이어질 수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책을 읽고 야수가 벨과의 대화를 통해서 마음을 조금씩조금씩 열기 시작하면서, 성 주변의 정원에도 눈이 그치고 햇빛이 조금씩 든다는 점은, 야수의 마음가짐과 상태가 그 공간의 날씨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어쨌거나 날씨가 풀린다는 것은 야수의 마음이 조금씩 열린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벨과 야수와의 관계도 조금씩 진전되어가는 과정에서 '책'은 핵심적인 역할이다.

    3. 자유 없이 행복할 수 있는가

    벨과 야수가 같이 춤을 추고 나서 밖을 바라보며 벨이 갖는 의문이 바로 '자유 없이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자유 없이 과연 행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의문은 사실 이 이야기의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유'가 벨에게 있어서 그간의 가치로는 전부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마을에서 벗어나 더 큰 곳에 가서 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살고 싶었던 내적 욕구를 해소하고 싶었던 벨은 '성'이라는 대안 공간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 성은 조금 다르다. 성에서의 '자유'는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유이다. 벨이 정말 '간섭하지 않음으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자유'를 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는 더 넓은 공간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지, 간섭하지 않는 공간을 바란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내 생각에는 벨은 단지 자신에게 '이상하다'(odd)라는 표현을 안하는 것을 바랐던 것 같은데 성은 그러한 것들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의미의 '자유'에 대한 의문은 '이 성에서 계속 지내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으로 볼 수 있다. 성에 들어오고 난 뒤로 부터 계속 성 안에서만 지내는 장면들에서 사실 이러한 고민들은 드러나지 않았는데, 같이 춤을 다 추고 난 뒤에 나타나는 의문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드는 인간적인 의문으로 볼 수 있다.

    '자유'없이 행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과 연관되는 이유는, '성'에 있음으로 인해서 마을에서 누렸던 자유와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을에서 누렸던 자유는 '마을'에서 누렸었던 제한적이지만,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에서의 자유에 해당하고, 성에서의 '자유'는 아버지가 제공하던 자유가 아닌, 스스로 이끌어 나가는 선택적인 자유에 더 가깝다.

    나는 벨의 선택이 자유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본다. 그녀가 야수를 다시 찾으러 와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 까지도 말이다. 어쨌거나 야수는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고, 이어서 사람들이 죽이러 가는 '야수'를 구하러 간다. 분명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이걸 자유로운 선택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그러한 고민이 결여되었다고 받아들일 것이냐는 개인의 자유다. 나는 벨의 선택을 '고민'끝에 내린 선택으로 보지는 않는다. 고민하는 흔적은 없다. 단지 야수와 가까워졌고, 야수를 죽이러 가는 사람들의 오해를 풀러 가는 선택을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부분에서 '벨'의 고민 방향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확신하기가 힘들고, 그래서 전개에 아쉬움을 느꼈다.


    4. 인물

    1) 아가사

    사실 '아가사'가 요정일 수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다만 아가사가 아버지를 도울 수 없었던 점은, 끝까지 그 마을사람들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의도를 드러내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마을사람들도 저주의 대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성 안에서 일하던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이 '가족 관계'에 놓여있다는 점, 그리고 그 가족 관계에 대해서까지 아예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 또한 왕자의 못된 성품에는 마을사람들이자 성 안에서 일하는 집사들도 책임이 있다는 점 때문이다. 다만, 마을사람들이 반성하지 않았는데, 그들까지도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아쉽다. 그들이 정말 벨을 받아들인 것인가, 다름이라는 가치나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벨'을 받아들인 것인지는 전혀 드러나있지 않았어서 아가사가 이들까지 그냥 묶어서 용서한 점은 조금 허술하게 느껴졌다.

    2) 개스톤

    벨의 아름다움에 빠져 결혼을 하고 싶어하는 상대이다. 하지만 성격이 원만하지 않고 공감능력이 많이 떨어지며 그 마을에서는 최고의 사냥꾼으로 자리하고 있는 인물로 나타난다. 선술집의 사슴뿔을 모두 '자신이 잡은 것'으로 이야기하며, 책 따위는 읽지 않는 무식함을 내보인다. 그가 믿을 거라고는 자신의 외모와 육체적인 힘 뿐이다. 하지만 벨은 이렇게 무식하고 힘만 센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스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스톤의 이미지는 대체로 '붉은 옷'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서양에서 말하는 '붉은 색'은 대체로 이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본능적이고 직관에 의지하고 냉정한 판단력이 부족한 색이다. 이러한 이론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스톤이 행한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그게 결코 틀린 것만은 아닌 듯 싶다. 그리고 그의 친구 말대로, '괴물'은 진정 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으로 향하는 행렬에 있지 않던가. 아마도 개스톤과 같은 성품을 지닌 남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얻고 가지 않았을까 싶다.


    5.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

    주의 깊게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인트로에서 야수의 비극을 설명하는 장면과, 마지막에서 모두가 같이 춤을 추는 장면에 차이점이 있다. 바로 '화장'의 유무이다. 화장을 했다는 것은 외모를 보겠다는 것이고, 화장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더 이상 화장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벨이 야수에게 사랑한다고 하는 점도, 외모로 인해서 겁먹었었던 과거와는 다르게, 외양을 넘어서서 그 존재 자체를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보편적인 메시지 중 하나라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수도 있으나 나는 언급하고 싶었다.


    6. 뮤지컬

    확실히 뮤지컬 영화는 영어 듣기로만 해가지고는 잘 알아듣기 힘든 점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대사들은 알아듣겠는데 뮤지컬은 알아듣기가 힘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일반 대사는 그냥 듣고, 노랫말들은 중간중간에 자막을 보면서 뜻을 이해해야 했었는데 여간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다만, 최근에 접했던 뮤지컬 영화였던 '라라랜드'에 비해서는 노랫말이 단순하고 메시지의 흐름이 비슷비슷해서 많이 어렵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이 영화를 뮤지컬 영화로 만든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뮤지컬 영화의 특성상 대사와 감정 전달을 노래를 통해서 좀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데 이걸 잘 활용한 경우라고 보였다. 들어보니 과거에 에니메이션을 틀어주던 때에도 같은 노래를 틀어주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아마도 에니메이션도 보고, 이 영화를 '실사판'으로 확인하는 과정에 놓여있던 사람은 더 즐겁지 않았을까 싶다.


    한줄평 : 잘 정리된 에니메이션의 실사판, 다만 전개 상의 허술함은 디즈니 특유의 내용 전개 때문.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