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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Die Klavierspielerin)
    책/외국소설 2013. 5. 21. 19:13



    피아노 치는 여자

    저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9-12-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4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대표작『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내 살다살다 이런 서술방식의 소설은 처음이다. 좋다는것도 아니고 나쁘다는것도 아닌데, 음....굳이 말하자면 내가 선호한 부분은 한 30퍼센트 정도이고, 비선호였던 부분이 70퍼정도라고 하겠다. 이 책을 다 읽고나니까 밀란쿤데라의 에세이 '커튼'에 쓰인 문장이 하나 기억나는데, '로렌스 스턴이 스토리를 배제한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그 어느 누구도 그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떠오른다. 그 이유는,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라는 작품이 전무후무한 '이상한'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로렌스 스턴이 쓰지 않았다면 정말 안쓸만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리라. 단지 미학적, 철학적인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평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피아노 치는 여자'도 만만치 않게 이상한 작품이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어떠한 대화 부분도 따로 대화로 구분되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서술자가 서술하다가 주인공의 '말'이 나오면 큰따옴표가 나오고, 그 뒤에 주인공이 말하는것처럼 보여졌다가, 다시 서술자에서 보여지는 시각으로 바뀐다. 모든것은 '서술자'에 의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서술된다. 장면의 묘사, 체감되는 느낌, 주인공인 에리카와 클레머의 느낌, 그리고 그 주변의 상황들까지 서술자의 시각으로 보여지고 서술자의 생각으로 서술된다. 아마 앞으로 이런 작품을 다시 볼까 싶긴 한데, 한두번 쯤은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서술자는 초반에 에리카를 '회오리바람'이라고 칭하며 서술자가 바라보는 에리카를 '이미지'로 규정한다. '귀여운 회오리바람'이라는 말에서 나는 그녀가 굉장히 다루기 힘든 여자라고 느꼈다. 여자를 '다뤄야 하는 존재'로 보려는게 아니고,(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오해가 있을 수 있어서 말하는거지만, 난 여자도 남자도 동일한 자아를 가진 주체로 바라보기 때문에, 여기에서 회오리바람이란는건, 부모님에 한정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에리카의 어머니가 에리카를 소설 전반에 걸쳐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에리카의 어머니는 에리카를 어린시절에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피아니스트'로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에리카의 재능과 그 결과는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에리카가 40이 가까이 되는 나이에 '피아노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게 하는데 기여를 한다. 이는 지은이인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자전적 성격을 띈 주인공인점을 알 수 있게 해주는데, 옐리네크 역시 어린시절에 매우 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에리카의 아버지는 일찍 죽어버리고 마는데, 이는 에리카와 어머니에게 서로가 서로로서 남성의 빈자리를 메우는 강요를 하게 만든다. 어머니의 나르시시즘이 딸에게 투영되면, 딸은 어머니의 기대에 충족해야 하고, 여기에서 어머니의 나르시시즘은 두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는 자신이 딸에게 요구하는 것(피아노 연주를 위해서 엄청난 연습을 하는 것, 옷을 사지 않고 멋을 부리지 않으며 얌전히 다니는 것,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는것)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빈자리를 매우는 역할로 나타난다. 어머니가 저녁밥을 차려놓고 딸이 제 시간에 올때까지 눈에 불을키고 기다리는건 남편이 딴여자를 만나지 않고 제시간에 들어오는걸 기다리는 부인의 모습과 흡사하다. 이런 어머니에게 에리카는 '종속감'을 느낀다. 자신은 항상 어머니에게 속해있어야 하고 어머니에 의해서 의사결정이 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에리카는 남편을 잃은 어머니에게 남근을 대신하는 역할을 해야하면서 점차 다른사람들의 성행위를 관찰하게 된다. 이는 에리카가 일종의 관음주의자가 되어가는 이유가 되는데, 에리카가 남성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남자처럼 유흥가에 들어가서 여자들이 자위하는것을 바라본다. 거기에서 보는것은 핍쇼(peep show)인데, 칸막이에서 유리창 너머의 여자들이 야한 포즈를 취하거나 자신의 음부에 손을 대면서 야릇한 표정을 짓는걸 보는 곳이다. 남자들이 시간당 얼마의 돈을 내면서 자위를 하는곳으로 이용되는 그곳에 에리카가 가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카에게는 남근이 없고 이로인해서 에리카는 다른 남자들과 동일시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괴리감을 느끼고 다른사람들과 점차 차단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녀는 절대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에리카는 자신이 부러워하던 물건들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는 어머니때문이다. 이로인해서 다른사람은 있으나 자신에게는 없는것들을 그녀는 파괴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그녀의 사디즘적 성향이 강해진다. 그녀의 사디즘은 그녀가 가르치는 피아노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나타난다. 조그마한 실수만 해도 그녀는 엄청난 음악적, 예술적 지식으로 학생을 깔아 뭉개버린다. 아이러니 한건, 어머니의 너무하다싶은 구속과 지배는 그녀에게 마조히즘적인 성향을 증가시키게 되는데, 이는 에리카가 자신의 신체 일부를 면도칼로 긋고 피가 나오는것을 즐기는 행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결국은 이 복합적인 사도마조히즘을 클레머에게 강요하게 되면서 클레머는 '멘붕상태'가 되어버리는데, 이로인해 에리카가 클레머에게 요구했던 행위들(밧줄로 그녀를 묶거나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치는 행위 등, 그녀를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 행위)을 강요하는 상황에서 클레머는 자신이 에리카와의 관계를 주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에 빠져버린다. 이는 결국 후일 클레머가 에리카를 폭행하는 일로 매듭지어진다. 


       작가의 서술방식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녀의 인터뷰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서술방식은 음악이 언어화되면서 나타난 방식이라고 하는데, 음악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서술방식에 대해서 매우 이상한 서술방식이라고 이해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하지만 난 작가의 말에 동의하기 힘든게, 나도 잘 이해가 안됬다. 이런방식으로 왜 쓴건지. 그 자체에 대한 의문은 굉장히 컷다. 다만 밀란쿤데라의 '커튼'이란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은 이제것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또다른 가치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읽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느정도 읽기 시작하면 또 읽히는게 책 아니겠는가. 그녀의 서술방식은 어머니의 교육이 굉장히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음악으로만 펼치기는 싫었기에 일어난 반발작용과도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 부분은 옐리네크의 소설을 읽고싶다면 응당 이겨내야하는 부분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보기드문 소설이었던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에 푹 빠지진 않았지만 감명깊게 남아서 기쁘다. 이 작가와 이 소설에 대한 논문을 몇편 보는걸로 이번 독서는 마무리해야겠다. 아참, 찾아보니까, 'the pianist'라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영화가 있던데 이 영화가 '피아노 치는 여자'를 원작소설로 만들었다고 하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면 될것 같다. 마침 이 영화로 칸영화제에서 석권을 했던 기록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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