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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MCA(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회 후기, 160522
    예술 읽기/전시회 후기 2016. 5. 24. 12:59
    0. 
     
    고민을 좀 했다. 동대문에 갈지 국립현대미술관에 갈지. 결국 무료관람 행사를 하는 현대미술관으로 갔다. 날씨가 조금 덥긴 했지만 전시회 자체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현대 미술, 설치 예술에 관한 생각 겸 전시회 후기를 같이 쓸 까 한다. 영어로 옮기고 싶은 계획도 있는데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어차피 한글로 쓴 것을 영어로 옮길 계획이니, 한글로 먼저 쓰고, 영어로 옮길 까 한다.

     


    1. 도입

     사실 그동안 설치 예술과 회화에 관한 구분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이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시작한 시점은 14년도 부터였으니까, 그때는 어느정도 회화, 조각, 설치예술, 비디오 아트에 관한 지식이 쌓이고 난 뒤라서 가능했다. 이번에 현대미술관 전시를 다녀오고 나니까 새로운 개념이 하나가 생겼는데, 바로 '설치 예술'에 관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회화를 대부분 더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현대 회화가 아닌 근대 서양 회화를 많이들 좋아한다. 르네상스의 회화는 다소 고전적이고, 중세의 서양 회화는 신격화와 신화화가 많이 되어 있으며 비 현실적인 그림들 때문에 종교적으로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사람들이 눈을 두는 것을 보기가 힘들었다.(유럽에서 미술관을 다닐 때에도 확실히 중세 쪽에는 사람이 적었던 게 생생하다. 프랑스 혁명 즈음의 작품들만 가도 우글우글하던 사람들....) 나도 서양 근대 회화가 현재의 그림들 중에서는 가장 보편적인 그림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서양화가들은 다 근대 화가들이다. 몇 일전에 친구가 이야기하던 마네와 모네도 그렇고, 고흐, 고갱, 쇠잔, 쇠라, 고야 등 다 근대화가가 주류를 차지하는 서양 근대회화는 아마 현재 한국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가들만 모아놓은 하나의 '카테고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보면서 들던 생각은 역시 미래의 예술은'설치 예술'이 아닌가로 정리되었다.

     내가 만약 설치예술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가장 큰 특징으로 바로 입체성과 현실성을 고를 것이다. 회화는 그림으로 존재한다. 액자 속의 그림으로 존재한다. 또 다른 종류의 예술인 조각은 회화들에 나타나던 주제나 인물들을 석고나 청동으로 재현해낸 것들이 많다. 물론 '재창조'이면서 완전히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완벽한 인간을 구현하려한다는 점에서는 큰 맥락을 같이한다.(인상주의의 그림은 조금 독특한 경우니까,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미리 말해두겠다.) 그러나 이 '재현'은 대개 제한적인 재현이며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면 대형 조각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게다가 조각은 조각으로서 존재하지 사람처럼 보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로댕의 작품들중에서는 너무 '사실적'인 조각이 있어서 약간 다른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큰 주제에서는 르네상스의 조각이나 근대의 조각이 많은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미켈란젤로나 '로댕'과 같은 작가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는 있더라도 그 외에는 익히 아는 조각가들이 몇 안된다는 점과, 그 조각들의 대부분은 형태가 많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다양성에는 큰 차이가 없다. 예를 들어서 특정한 조각작품 A가 어떤 시대의 조각인지 알 정도라면 그 조각의 신체 비율에서 알게될 확률보다, 작품의 모양을 알고 있어서 인지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설치예술을 보고 있자 하니 다양성도 있고, 입체적이며 가장 현실적이면서 이질적이고, 작가의 의도와 관객의 해석이 가장 맞물리기 힘든,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책에서, 신문에서, 글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조금 느낀 기분?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들은 아방가르드니 뭐니 하면서 엄청나게 큰 변혁을 이루었지만, 그 변혁이 괜찮은 가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의문이 많았었다. 우리는 보통 '미술'과 '음악'을 예술과 동일시 하지, 어떤 행위에 대해서, 어떤 설치물에 대해서는 '예술'과 동일시 하지 않는다. 그 대상에 대해서 '예술'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한다. 행위 에술이라고 일컬을 때 '행위 예술'이 되는 것이고, '설치 예술'이라고 부를 때 비로소 그 설치물은 하나의 예술로서 인식되고 인정받는다. 그만큼 언어의 힘이 무서운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언어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고유한 '예술'의 개념이 존재한다.  
     

    이번에 보고 온 설치 예술 몇 작품들을 예로 들겠다.

    2. Bit fall pulse

     

     이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이전에, 이번 전시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을 해야할 것 같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미술'관이다. 현대미술은 그 형태가 가장 다양한 미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가 작품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한 데, 이번에 보고 온 것은 '질 바비에'의 작품, 율리오스 포프의 '비트 폴 펄스(bit fall pulse)', '망상지구'전과, 하나의 사진전이 있었다. 제일 처음 언급할 작품은 율리오스 포프의 비트 폴 펄스이다.  
     이 구조물은 입구에서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본 작품이다. 대한항공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이 프로젝트는 컨테이너를 활용한 작품이다. 물을 순간적으로 뿌려서 '글자'를 무작위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이를 보면서 다양한 생각들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글자를 알아보기가 힘들어서 많은 이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데 중간중간에 아는 단어가 나오면 사람들이 그 단어를 소리내어 읽고 것을 보면서 어찌되었든 모든 사람은 작품이 주는 메세지를 읽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인터뷰 영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의도가 '다양한 단어를 보여주면서 관람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연상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작가의 말이 사실 중요하다기 보다는,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점이 따로있었다. 바로 더 이상 '설치 예술'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는 그 느낌이 중요했다. 어찌되었든 '예술'은 감정적인 부분을 바탕으로 하지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분야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느낌'이 중요한 것이다. 


     설치 예술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뒤샹의 '샘' 이후에, 작가들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말 '전위적'인 설치 예술이 많았다면 지금은 다소 소통이 가능한 설치 예술, 현대 미술로 바뀌고 있다고 본다. 솔직히 나는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평가할 만큼 권위자는 아니다. 내가 미술품을 보는 가치관을 뒷받쳐줄만한 어떤 증명서는 없다. 그 증명서를 이제것 다녀온 수 많은 티켓으로 대신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하여튼! 그 누가 '브릴로 상자'를 보면서 자본주의를 떠올릴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 어렵지 않을까 라는 결론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브릴로 상자든, 베토벤의 수 많은 사진이든, 분명 팝아트는 특정한 예술과 인기있는 예술간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측면에서 높이사면서도, 여전히 그 오브제를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이번에 가서 본 작품들을 바라볼 때는, 약간 다른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친절해졌고 공감하기에도 더 쉬워졌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는 맥락이 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머리가 좋은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관객들이 즐기고 있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브릴로 상자를 두고서, 통조림 캔을 형상화한 작품들을 보고서, 아주 큰 담배꽁초를 형상화 한 작품들을 보면서 그것에 대해 공감하는 이들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는 어떤 공감 지대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연결지점이 있어야 하는 데 그 연결 지점을 만든 다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작가의 의도는 더 이상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우선시 되기는 힘들어졌다. 관람객과 청자가 개개인의 의미 부여를 하는 시대에서 이번에 보고 온 작품들은 상당히 의미있었다. 작가가 의도하는 바를 어느 정도는 사람들도 이해하는 듯 했고(반응들로 미루어보아) 동시에 사람들 개개인의 의미부여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생각하는 사람들, 따라하는 사람들, 어느 것이든지 '자신만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렇다보니 'bit fall pulse'는 여러가지 기대를 충족했다. 해석의 다양성, 작품의 난이도(난해성), 소재를 사용하는 측면의 현대 예술성(소재의 제약과 제한이 적어진 점) 등 다양한 부분에서 '현대 예술'다운 작품이었다. 근대 예술은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었다면(오페라와 연극 등은 제외하고) 지금은 비디오 아트나 설치물 등을 통해서 다른 세계가 열리고 있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다고 느꼈다. 기존의 재료인 '물감'과 '석고'를 벗어난 재료들은 현대 예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현대 예술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3. 질 바비에


     사실 내가 보고 싶었던 전시회는 '질 바비에'전이었다. 나는 예전에 프랑스 현대 미술에 관한 좋은 기억이 있다. 두 번이나 간 전시회가 몇 안되지만 당시 과천에서 열었던 오늘의 프랑스 미술전은 두 번 다녀온 전시회였다. 대부분의 설치 예술과 비디오아트로 구성되어 있었고 약간의 회화가 있었다. 과천관의 특성상 규모가 크면 그 큰 규모를 다 담아낼 수 있을만큼 전시관이 큰데 그 공간을 다 활용했으니 꽤 볼 것이 많았다. 당시 프랑스의 현대 작가 10명의 작품들을 가져왔다. 그때 당시에는 '질 바비에'가 그 목록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게는 이 전시가 이 사람의 전시로는 처음이다. 주제가 '에코 시스템'이었는데, 말에서 오는 어떤 특정한 기분이 무슨 '친환경'그런 것인가 했다가 전시를 보다보니 역시 언어는 자의적인 측면이 강하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질 바비에가 20년 넘에 자신만의 색을 나타내는 작품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이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가 이 작가를 선택했다고 말했으니 작가의 고유한 정체성은 작품에 잘 녹아있지 않았나 싶다. 비록 공간이 조금 작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고 본다. 
     



     특히 작가의 말대로 위와 같이 자신이 쓰고 싶은 재료가 없어서 있는 재료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말이 묘했는데, 자신의 위치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최선을 다하는 열정의 결과들을 보다보니 배우는 게 좀 있었다. 질 바비에가 근대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한 교수를 찾아갔더니 현대 미술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그 교수의 조언을 듣고 작가로 접어드는 이 과정은 내게 있어서는 참 묘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결국 그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상황을 인터뷰에서 요약하고 있는 셈인데, 이게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 안에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만 핵심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었고 어느 순간 나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듯 했다. 저기에 앉아있던 꼬맹이와 어르신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4. 망상지구



     망상은 와, 정말 대박.. 여기는 체험을 해봐야 한다. 내가 이렇게 글로 쓰고 사진을 가져와봐야 실제로 가보는것만 못하다. 나름대로는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공간들을 카메라로 찍었지만, 그 분위기를 구현하기가 어렵기만 하다. 뭔가 보여주기가 좀 들다. 그래서 하루 빨리 이 전시가 끝나기 전에 꼭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경계'가 흐릿한 전시는 이 전시가 매우 독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체험에 특화되어 있어서 금방 지나치게 되는 데 그 안에서 생각해볼 거리는 많다. 어느 예술 작품이던지 이제는, '해석자'의 몫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닐테니까.
     혹시 생각이 있다면 전시관 앞에 있는 설명만 잘 읽고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대개 그 앞에서 떠드느라 설명 안보고 그냥 체험 공간 수준으로 여기고 들어가서 재미있게 놀다가만 오는 데 재미를 넘어선 생각의 기회도 이 전시에는 존재한다.



    5. 사진전, 안규철 전

    사진전은 작가가 너무 많아서 집중하기가 힘들었고, 그게 나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사람도 너무 중구난방이고, 전시 규모가 크면 주제에 대해서 집중하는 힘이 떨어지는 것 같다. 내게는 역시 특정한 주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오른게 위의 '토요일밤'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현대사회의 단면, 이런 장면을 예전에 프랑스아 오종의 영화, '인 더 하우스'에서 본 기억이 났다. 관심있으면 한 번 보는것도..

     안규철 전(밑 사진)은 관객 참여라는 측면에서 점수를 높이 주고 싶다. 하지만 어떤 특별한 매력은 없어서 아쉽다. 현대 미술이긴 한데 이 분의 공간은 조금 더 '개성'있는 공간이 되어가는 과정 같았다. 물론 밀실 같았던 그 설치 작품은 묘했다.



    6. 마치며

     이날 날이 좋았다.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한복을 사람들이 계속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술관에 혼자 온 사람들이 전보다는 많은 것을 보면서 조금은 시대가 바뀐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현대 미술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그 취향을 누군가와 공유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커플들이 온 경우를 보면 그냥 '데이트'로 오는 경우가 있는 것 같고, 정말 현대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 오는 경우가 있는 듯 한데, 어쨌든 전보다 미술에 대한 관심들이 늘어난 것 같아서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많으면 사회가 조금은 더 지적인 사회로 갈 수 있지 않나 하는 희망을 가졌다. 물론 어이없는 일들도 있었다. 한국인데 길좀 비켜달라고 할 때나 당황해서 미안하다고 할 때 한국어를 쓰면 되는 것을 "Excuse me'라고 하거나 "sorry'라고 하는 것들은 이해가 안되었다. 서울이 그 정도로 국제적이었나? 국제적이라고 해도 아니 한국이잖아..괜히 국어교육 전공자라고 이런다.

     어쨌든 현대미술이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면서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확실하게 모르겠다. 아마도, 현대미술이 주는 특유의 감각이 단순히 보고 감상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은 보고 감상하고 체험까지 할 수 있게 여유를 두는 듯 하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 비디오아트처럼 여전히 '감상'위주의 시간을 보내야하기도 하며 '설치 예술'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기도 하겠지만, 점점 이 현대 미술이 자신만의 고유한 자리를 잡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른들에게는 우리가 보고 자라온 대부분이 회화와 조각뿐이고 이제 갓 설치예술에 익숙해지기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창의력이 키워지는 공간, 시각이 넓어지는 공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스톡홀름에서 지하철 역에 그려진 그림과 역사지도를 보면서, 수 많은 디자인의 다채로움을 보면서 자란 그들에게는, 그게 일상이 되어버린 스톡홀름 학생들에게는 평소에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폭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한국에 있는 사람들, 학생들도 생각의 폭이 더 넓어졌으면 좋겠다. 어느 것이든 일상이 되어 있는 순간 더 조합하기 쉬운 하나의 요소가 될 것이고 그만큼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며 표현할 수 있는 폭 또한 늘어날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샌가 '다양성'이 '다양성'이라는 말로 표현되지 않고 일상이 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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