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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정은 환경에서 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품는 것이다 /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회 후기 / 160716
    예술 읽기/전시회 후기 2016. 7. 21. 12:39

    0. 지난 토요일 - 16일에 이중섭, 백년의 신화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전시회 나들이었기 때문에 나름 기대를 했었고, 이번 전시회에 친구가 같이 가자고 해서 친구를 상대로 1일 큐레이터를 하기 위해 평전도 읽고 갔습니다. 그 평전은 '이중섭 평전, 최열, 돌배게, 2014'입니다. 만족도를 먼저 이야기하자면 '★★★★☆'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전시회였습니다. 이렇게 추천하는 전시회가 종종 있는데 이번 전시회가 그 하나라는데에 저는 기쁩니다. 생각해보면 올해 갔던 전시회는 대체로 만족스러웠군요. 본론으로 넘어가죠. 

    문화학원 시절 이중섭

    1. 책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이중섭은 '신화화' 된 한국 현대의 미술가 중 한 명입니다. 나이 40에 병원에서 쓸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삶은 '예술 지상주의자'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것들을 떠나서, 그가 남긴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는 그의 이야기가 없다면 이러한 '신화화'조차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수 많은 기록들로 정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습니다. 한국 현대 미술사에 상당히 큰 발자취를 남긴 그의 전시회가 이번 덕수궁에서 열렸던 것이고, 지난 토요일에 그곳에 들렸습니다.

    저는 덕수궁을 여러번 갔었습니다. 예전에 만나던 애인과 한 번 갔었고, 대부분은 혈혈단신으로 미술 전시회를 보러 갔었습니다. 기억나는 전시로는 미국미술 300년 전시회가 있군요, 아직도 그 때 보았던 '브릴로 상자'는 생생합니다. 제게는 기억이 많은 곳이에요. 궁궐이 크지 않지만 거닐기에 정말 괜찮은 곳이거든요, 여기에 이렇게 미술관 특별전시실이 있음에 저는 항상 기뻤습니다.


    2. 먼저 전시회 테마를 설명하자면, 시기가 아닌 '작품'위주의 구성이었습니다. 총 4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덕수궁 미술관'이라는 구조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고 이중섭의 많은 그림들의 창작 년도가 정확하지 않은 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최측에서는 '은지화' 한 실, '편지화'와 서울에서의 삶에 대해서 한 실, 50년대 이전의 삶에 대해서 한 실, 대구와 정릉에서 말년을 보냈던 시기에 대해서 한 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안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전시회가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졌는지는 긍를 통해서 설명하고, 사진 파일들을 참고해서 설명하겠습니다.


    3-1 은지화

    이중섭의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을 고르라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언컨대 '은지화'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저만 해도 이중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도 '소'와 '은지화'는 알았습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은지화가 2 전시실에 배치되어 있긴 했지만, 이중섭의 상징적인 작품들인 만큼 먼저 은지화 몇 장을 예로 보겠습니다.

    '은지화'는 이중섭이 담배값 속에 있던 은지에다가 그린 그림들입니다.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색을 입히는', 작업을 통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은지를 긁어내고 색을 입히는 과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중섭은 소묘를 매우 중시했던 작가입니다. 그의 제자 김영환도 그러한 소묘의 중요성을 이중섭으로부터 배웠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한 재능이 은지화에 나타나면서, 선을 통한 그림을 그가 그려내기 시작했던 것이 바로 이 '은지화'입니다. 도대체 왜 담배값 속 '은지'에다가 그림을 그린 것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가난'떄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결코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중섭의 외가 집안은 부자 중에 부자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그러한 재력을 바탕으로 그의 이종사촌은 이중섭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이미 일본에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고 있을 정도 였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고나서는 이미 집이 가난해진 상황이었고, 그가 원산에서 부산을 거쳐 제주도로 피난을 왔을 때에는 제대로 된 돈이 없었기에 하루하루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그에게 '은지'는 우연한 기회에 얻은 종이의 하나였던 것이고, 그러한 은지에 이중섭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은지화가 주로 그려진 시기는 역시 피란 생활 시기입니다. 부산과 제주도를 오가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전시실에서는 '은지화'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최대한 어둡게 공간을 구성하고 '은지화'에 대해서만 빛이 갈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다만 은지화를 한쪽에 벽면에 몰아버렸는데, 전시실의 특성상 '출입문'의 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배치한 것입니다만, 역시 공간 활용이 다소 아쉽습니다.


    3-2 50년대 이전의 삶 - 1 전시실

    상당히 아쉬웠던 부분입니다. 이중섭에게 있어서 50년대 이전의 삶, 즉 태어나서 중고등학교 시절, 그리고 제국미술학원을 거쳐 문화학원에 다니던 시절, 마사코씨와 결혼하고 난 뒤 광복 후 원산에서 미술 활동을 하며 피난 오기 전의 이야기가 단 '한 실'에, 지나칠 정도로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쉬웠습니다. 여기에서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전시실 이동 경로상 가장 첫 번째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는데...너무 짧아가지고..그마저도 중간의 공간 일부는 영상 공간으로 대체해버렸더군요..그러다보니 저와 같이 간 친구에게 안타까움을 토로하며 해설을 시작했었습니다.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이야기를 하는 수 밖에 없었죠. 10대, 20대의 삶은 그의 미술 생활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인 만큼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당시 친구에게 했던 해설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오산학교에 다니던 이야기

    이중섭은 평양2고등보통학교의 시험에 떨어지고 난 뒤 외할아버지의 추천으로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 갑니다. 평안북도 정주는 평안도에서 유일하게,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나왔던 도시입니다. 나중에 이 평안북도 정주 출신 사람들이 핵심이 되어서 만들어진 잡지 중에서 '사상계'라는 잡지도 있습니다. 평북 정주 출신의 또 다른 사람으로는 '백석'이나 '이광수' 같은 이들이 있겠군요. 마침 오산학교의 설립자 '이승훈'과 이중섭의 외활아버지는 연분이 있었고, 이를 통해서 오산학교에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산학교 미술부에서 미술활동을 하던 당시에 만났던 동료, 후배들은 나중에 이중섭이 도쿄로 넘어가면서 또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오산학교 미술부의 위치는 상당했다고 보였습니다. '문학수'와 같은 이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문학수가 '말'을 그렸다면 이중섭은 '소'를 그림으로서 이 둘의 그림은 많은 비교 대상이었으며, 이중섭의 기록에는 '문학수'를 높이 샀던 흔적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만난 예일대 미술과 출신 임용련 미술 선생은 이중섭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그 후 임용련의 지도하에 대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몇 번의 입선을 거쳐 이중섭이 '미술'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물론 중간에 팔을 한 번 다치면서 학교를 쉬는 일이 생기지만, 그 시기에서도 이중섭은 성숙을 이룬 것 같습니다.

    2) 도쿄 유학시절

     


    왜 도쿄로 유학을 갔을지, 이 부분에 대해서 최열은 이런 이유를 듭니다. 이중섭은 '파리'를 가고 싶어했지만, 제국 미술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조선에 돌아와서, 자신이 결국 유학을 하기 위해서는 집안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비교적 좀 더 가능성 있는 문화학원을 선택한 것이고, 처음에 제국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는 경위는, 당시 도쿄미술학원을 들어가기 힘들었던 점, 그리고 이중섭의 이종사촌들이 이미 도쿄에서 자리잡아 학교를 다니고 있던 점 등을 들었습니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쓸 수 있겠죠. 주변 사람들이 일본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중섭이 제국 미술학교를 갈 때에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오산학교를 마치고 20세가 되어 일본으로 미술공부를 하러 갔고, 제국 미술학교를 거쳐 문화학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문화학원은 당시에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기록에 남겨져 있습니다. 1944년에는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를 계속 지키고 싶어했던 것 때문에 결국 폐교되고 말지만, 이중섭에게는 문화학원에 다니던 당시에 만나게 되는 마사코와는 결국 결혼하게 되었고, 문화학원에 연구과로 다니던 시절에는 그 유명한 '그림엽서'를 마사코에게 보냈으며, 이 당시에는 활동도 많았습니다. 자유미술가협회 활동도 하고, 당시 조선인들끼리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제 시각에서는,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색채가 다양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선이 부드럽고 아름답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림을 못그리던 시절이 아니었던 상황에서 '예술지상주의'자로서 이중섭의 삶은 이 때가 가장 빛나던게 아닌가 싶습니다. 20대-30대의 청년 시기란 무릇 힘이 넘치고 열정적인 시기라고 하는데, 이중섭도 그랬던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았던 이중섭의 삶은 일본이 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나서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림 엽서의 경우 약 20편 정도 넘는 작품들을 한 벽면에 모았습니다. 보다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이미 마사코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요.

    3) 유학 후 해방 전 원산에서의 거주

    일본이 미국과 영국에도 전쟁선포를 하게되면서 일본은 점점 위험에 빠지기 시작했고, 이중섭은 원산으로 먼저 건너오게 됩니다. 마사코와 이별을 했으나, 이후 마사코는 목숨을 건 항해 끝에 조선에 도착해 이중섭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때 지어진 이름이 '이남덕'입니다. 이중섭의 미술 작품에 있어서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씨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수 많은 작품들을 보게 되니 참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중섭의 '화공'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더군요. 혹자는 '야마모토 마사코'가 아니어도 이중섭의 작품들은 나왔을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지만, '야마모토 마사코'는 목숨을 걸고 전쟁 중에 바다를 건너 이중섭을 만나러 왔고, 그런 마사코와 원산에서 45년에 결혼을 올리게 됩니다. 마사코씨 또한 이중섭에 대한 사랑은 극진하였습니다.

    4) 45년 ~ 부산으로 피난 오기 전, 원산에서의 삶

    전시회에서는 원산의 삶도 길게 서술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에는, 원산에 남겨두고온 작품들을 볼 수 없기 떄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산에서 광복 이후 머물다가 구상의 작품집 '응향'의 삽화에 관여한 이유로 조사를 받게 되고 이후 국군이 원산을 점령했다가 이후 흥남철수를 시작할 때, 이중섭은 자신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 배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대부분의 작품은 원산에 두고 오게 되면서 45~50년대 초의 작품들은 남아있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중섭은 미술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이 있으며, 당시 북한에서는 '평양'에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도시가 원산이었던 만큼, 그 세력과 규모는 짐작하기 힘드나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 만난 오장환은 전에 만났던 때와 다르게 공산주의 이념의 이상에 몰입된 사람으로 다시 접하고, '구상'의 경우 남한으로 먼저 도망가지만 이후 이중섭의 삶에서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됩니다. 구상은 이중섭이 죽고 난 뒤 이중섭을 위한 시도 짓습니다. 구상이 조사를 받다가 도망치는 걸 잠시 살펴보면, 당시 평양에서 조사차 온 사람으로는 한설야와 송영와 같은 이가 있었는데, 한설야는 해방 이후 김일성 우상화에 몰입하게 되는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공산당 중앙지도부에서 보기에는 원산 안에서의 단체 활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문화부 사람들을 보낸 것입니다. 참 세상이 좁죠. 어쨌거나 이렇게 '원산'에서의 삶이 끝나고, 흥남 철수 때 가족과 같이 배를 타고 내려오는 이중섭은 또 다른 삶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또다른 삶이 2, 3, 4 전시실에 있었습니다.

    사실 첫 전시실이 아쉽긴 했습니다. 전시회의 특성상 그림이 없는 '텍스트'만 있는 전시는 비교적 구성하기에 애매했기 때문에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한 것이 이해는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겠죠. 그렇다 보니 그 이후의 시기에 초점을 맞춘 느낌이었습니다. 그 이후의 시기는, 남한에서 이루어집니다. 부산, 서귀포, 통영, 서울, 대구에서 머물던 시절이 바로 남한에서 활동하던 시기입니다. 다행이라면 원산까지의 작품 활동 중에서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그림엽서와, 도판으로만 남아있는 작품들을 출력 후 전시해놓은 것들이 있으니 그것들은 꼭 보시면 좋겠습니다. 큐레이터가 어디까지 설명해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지 못했고(당시 제 시간대에 도슨트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평전에서 읽고 간 내용에 비해서 아쉽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지 사람마다 이 부분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도슨트에서 원산까지의 부족한 내용을 채워준다면, 그의 예술지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겠지만, 그러는 걸 본적이 없어서 말이죠. 그래도 이 글을 참고하시면 대략적인 원산까지의 삶을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3-3 통영, 서울


    어느 철강회사의 사장이었던 유강렬의 도움으로 통영에서는 비교적 안정된 작품 생활을 했습니다. 이 떄의 그림들은 다시 '색'이 살아납니다. 물감도, 종이도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었던 시기였고 이중섭 본인도 정서적인 안정기를 누렸던 시기로 보입니다. 당시 통영의 유명한 다방에서 이중섭은 유치환과도 만나고 다른 예술가들과도 시간을 보냅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들 중에서는 통영의 바닷가 풍경을 그린 작품들, 충렬사를 그린 작품 등이 있는데, 전보다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고 정신도 풍요로움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단 물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인 여유를 좀 더 확인할 수 있고, 그림의 구성에서 평화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정신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중섭 본인이 자신의 그림은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은 이런점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통영에서 작품 생활을 하고 서울에 올라와 개인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장소는 미도파 화랑이었습니다. 당시 미도파 백화점 안에 있는 미도파 화랑은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의 화랑중에 하나였습니다. 이곳에서 여는 전시회의 목적은 일본으로 가기 위한 여비의 마련이었습니다. 그렇게 작품을 준비하고 약 45점을 출품합니다. 이 떄 출품한 작품들 중에서는 나중에 홍익대학교 박물관으로 넘어가게 되는, 이경성이 주도하여 구매하게 된 '흰 소'가 대표적입니다. 이 당시 찍은 사진 중에서는 사촌 형이었던 이광석과, 그의 가족과 같이 찍은 사진이 대표적이고, 그 외 당시에 남아있던 방명록과 동료였던 한묵과의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개인전이 시작하게 되면서 차차 신문에는 이중섭 전시전에 대한 비평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당시 평단에서는 이중섭의 작품을 극찬했습니다. 그중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지 않는 다고 했던 비평이 유독 저는 기억에 남는데, 이중섭의 미술을 잘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중섭의 미술 자체가 김환기처럼 흐름을 따라가며 변화하는 미술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고유한 구성과 색, 터치가 존재했고, 그게 나타남에 있어서는 지극히 '동양적인 도상'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연꽃', '기러기', '사슴'과 같은 도상들은 이중섭 미술의 동양적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단서들이니까요. 전시회는 성황리에 마쳐졌지만, 안타깝게도 판 그림들에 대한 값을 수금하는 과정에서 수금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녀보지만, 이내 이중섭은 수금하는 일을 다른이에게 맡기고 대구로 내려가게 됩니다.


    3-4 대구, 정릉


    대구와 정릉을 하나의 전시실로 묶은 이유는 아마도 이 시기가 사실상의 '말기'로 기록되기 떄문이라고 봅니다. 서울에 이어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지만 대구에서의 개인전은 실패하게 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가는 길은 더더욱 어려워졌고, 이 즈음부터 이중섭은 정신 질환이 겹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림을 판 것에 대해서 자책감이 강하게 묻어나는 말을 했다고 증언한 구상의 기록을 보면 이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처음에는 정신 병원에서 전기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운 생활을 보낸 것으로 나오지만, 이후 우연히도 그에게 미술치료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렇게 첫 정신 질환은 그림 치료를 시작한 지 약 2개월여만에 극복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회복한 이후에는 정릉에서 생활하면서 화가로서의 생활을 다시 하게 되지만, 황달과 같은 내장 질환으로 인해 몸이 안좋아지게 되면서 정신 질환이 재발하며 이중섭의 건강상황은 악화됩니다. 이렇게 악화된 이중섭을 본 구상은 당시 매우 슬퍼했다고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결국 적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적십자병원 무료병실은 이미 '죽어가는 사람들'의 공간이었고, 이중섭은 56년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4 전시실에 있던, 그러니까 말기에 그렸던 그림들 중에서 기억나는 작품을 고르라면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을 고를 것입니다. 위에 보이는 그림이 바로 '돌아오지 않는 강' 연작 중 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흐리게 그려진 소'가 있군요. 흐릿해진 소를 두고서 저와 같이 간 친구는 이중섭의 삶이 그의 그림에서 다 나타난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모든 화가들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유독 이중섭의 그림에는 그 작품이 그려졌을 당시의 작가의 심리 상태나 주변 상황, 이중섭의 시선 들이 문득문득 느껴집니다. 그건 자신의 그림을 '삶의 표현'으로 간주했던 작가의 가치관과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간 '소'가 강인하게 나타났을 당시의 이중섭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기의 이중섭에게서 볼 수 있는 이 묘한 이미지가 그의 '말기'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전시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 후기를 마치며


    이중섭의 전시회에서 배운 점이라면, 그의 열정과 순수함이었습니다. 열정이란 단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이중섭의 창작열 때문이 아닙니다. 가난함에도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찾아가는 열정이 배울 것이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치는 편지와 엽서에서 느껴지는 '화공'으로서의 자부심이 그러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을 때에도, 영어나 한문을 쓰는 것이 아닌 한글로 가로쓰기를 하여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에서도 그의 철학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술지상주의자'로서의 삶을 추구했던 그가 그림을 팔고 난 뒤 느끼는 죄책감, 그리고 아들과 부인을 보러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기록들에서 저는 그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간 제가 꿈꾸던 순수함, 열정에 대해서 이중섭은 나이 40이 되어가도록 자신의 열정과 순수함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게 새삼 느껴지더군요.

    누군가는 그랬습니다. 헬조선에서 순수함과 열정을 가지고 살면서 계속 실패하는 삶을 살아갈 수는 없지 않느냐고. 순수고 열정이고 하고 싶은 일이고 잠시 점어두고, 일단 밥먹고 사는 것이 힘든데 어떻게 그러한 열정과 순수함을 계속 유지하느냐고 말이죠. 그런데 이중섭은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이후 격동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전쟁 때문에 아무 연고도 없는 남쪽으로 피난을 와서 힘들게 살아가는 와중에도 자신이 추구하던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계속 그리려는 '화공'에게 재료가 중요하겠습니까, 그렇기에 은지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요? 혹자는 그를 도와준 수 많은 사람들 덕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외조부도 그렇고, 구상도 그렇고, 사촌형 이광석도 그렇고, 철강회사 사장이었던 유강렬 등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줬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고. 저도 그걸 전체 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도와주는 것 또한 이중섭의 사람됨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열정과 순수함을 몇십년이 지난 그림만 가지고도 느낄 수 있는데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어땠을지.. 제가 남아 있는 기록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정리하자면 이중섭이라는 사람의 모습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성찰도 조금 있습니다. 그간 스스로 로맨티스트가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순수함과 낭만은 연결되는 지점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이중섭이 보낸 편지들을 보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로맨티스트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반성 했습니다. 로맨티스트 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더군요, 이중섭의 수 많은 그림 엽서와 편지를 보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정도로 그의 작품들이 엄청난 아우라를 내뿜는걸 느꼈습니다. '아스파라거스'와 같은 표현을 쓰는 그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할지, 과연 그동안 나도 관슴적인 것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발버둥치기는 했는데 그러긴 했던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흠,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을 떠나서, 어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과 그 언어에는 참으로 여러가지가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에서 열정을 배울 수 있다는 점 또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너무 성찰에 관한 내용만 썼을까요, 지나치게 교과서적인가, 하지만 그만큼이나 이중섭은 강렬했습니다. 예술가에 대해서 판단하는 기준에는 그 예술가의 '작품'이 어떻느냐에 따라서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데, 이중섭의 작품에서 제가 추구하는 순수와 열정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강렬했습니다. 게다가 비단 그의 열정이 주변 환경에서만 온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도 있었다는 걸 느낀거죠. 제게는 의미있는 한 사람으로서 이중섭을 머릿속에 적어둘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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