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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버나드 쇼, '피그말리온'
    책/외국소설 2013. 9. 8. 20:08



    피그말리온

    저자
    조지 버나드 쇼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11-06-01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빈민가의 꽃 파는 소녀, 런던 상류 사회에 입성하다!셰익스피어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버나드 쇼는 여러가지의 '여성상'을 구현했던 작가로 매우 유명하다. 성녀 조안의 '조안'은 매우 신성하고 자신의 말이 곧 하늘의 뜻임을 의미했던 그런 여성이었고, 이 책은 언어학자인 '시긴스'가 '일라이자'를 어떻게 키워가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여기에서 소재가 되는 것 또한 바로 '일라이자'(여성)이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만 좀 더 구체화를 하자면, '길거리의 꽃파는 소녀'를 데려다가 '공작부인과 비슷한 기품있는 여성'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히긴스교수가 피커링 대령과 내기를 한다는 점 자체는 엄청나게 흥미롭다고 할만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히긴스 교수가 '천한 여자(일라이자)'를 대하는 모습에서 한가지 충격을 받았고, 이 일라이자가 시간이 지나, 헝가리 왕족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교육받기전에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안타까워 하는 모습에서 뭔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교육이란건 항상 그런것 같다. 받아서 좋은것도 있지만 한번 받아서 알게 모르게 몸에 체화된건 다시 떨쳐버리기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건 평생 지고 가야할 '자신'이 된다. 일라이자는 교육을 받은 숙녀로서 다시 태어나게 되면서 더이상은 자신만의 여성성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통해서 얻은, 동시에 남성이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는 '여성성'을 획득하게 되는것이다.

       일라이자를 통한 여성의 자의성을 보여주는것 또한 주목할만한 점이다. 일라이자가 바뀐건 히긴스의 교육과 의지도 있지만 가장 주가되는건 바로 '그녀의 의지'이다.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변할 수 없었다. 그녀가 원했고 변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변한것이다. 그녀의 자의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을 것들이 그녀가 마음먹음으로서 일어났다. 남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일라이자의 여성성 발현은 이와같은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쇼가 지금 봐도 굉장한 페미니스트였던 점은 바로 지금처럼 작품에서 구현하는 여성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오늘날의 페미니스틀이 주장하는 것들(예를 들면, 여성의 대안이 단순히 남성의 제안과 다른게 아닌 '여성'들에 의한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들)과 크게 다른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선구자로 비춰지는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성에 대한 정의'외에 또다른 시사점은 바로 '신분제도'에 대한 시각이다. 첫번째, 당시 영국의 신분사회에서 여성은 여전히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애매한 위치였다. 경제활동에 참여를 하는 여성도 스스로 당당하기 힘들었고, 주위의 시선또한 곱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들의 경제력에 의존하는게 보통의 경우였던 시대였다. 하지만 주인공 일라이자는 꽃을 파는 일을 통해서 자신이 돈을 벌려고 했다. 이 점은 당시 사회인식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새로운 여성' 혹은 '용기있는 여성'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다른 부분은 신분제도가 '허울'뿐이라는 비판의식이다. 일라이자는 돈도 없는 일약 거지 소녀였는데, 히긴스의 교육으로 '헝가리 왕족'이라는 소리를 듣고 히긴스의 집에 돌아왔다. 일라이자의 말투와 억양, 행동으로 그녀의 신분을 판단하는건 실제 그녀의 삶을 보는게 아니라 당장 보이는 '외형적인 것'에 집중하는 영국의 당시 분위기를 비판한것이다. 프레디와 클라라 집안의 허울에서도 보여지는데, 그들이 그다지 부자집이 아닌데도 부자인 친척과 지인들을 만나며 그들과의 친분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당시 상류층들이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받아놓은 돈을 잘 쓰겠다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건 남자주인공이 아닌 여자주인공을 통해서 사회를 그려냈다는 것이다.(히긴스와 피커링 대령이 쓸모없었다는게 아니라, 주가 된 인물이 여자였다는걸 말하는 것이다.) 버나드 쇼의 어린시절, 어머니는 사랑을 주지 않는 여자였다. 어머니는 자신 뿐만아니라 쇼의 누나들에게도 매우 차가운 존재였다. 쇼는 아버지를 더 닮은 '남자'였기 때문에 남편을 싫어했던 쇼의 어머니는 그를 유독 더 싫어했던것 같다.

       어린시절의 모성애 결핍은 '존 버나드 쇼'에게 다양한 여성상을 그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여성편력이 심한 남자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사람은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을 더 찾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인 '부모'가 굉장히 중요한데 성장과정 속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는 쇼에게 매우 부정적으로 다가왔지만 그걸 지울만큼 사람은 강인하지 않기 때문에 이게 다양한 형태로 그의 기억에 남았고 이는 아내와의 불화나, 영화배우였던 켐벨이나 엘렌 테리와의 사랑으로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나는 쇼의 이런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내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내 어머니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이중적인 성격(변칙적인 면)을 거의 빼다닮은듯 하고, 무의식중에 어머니와 자주했던 책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다만, 버나드 쇼는 불운하게도 어머니를 그다지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했고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대단한 극작가로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것 같다.



       그동안 나는 소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평등주의자였다. 내가 주장하는 평등주의라는건 여자와 남자는 평등하고 부릴 수 있는 힘이나 권력, 정신적인 영향력, 주장하는 것들의 가치들이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난 오류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다른 존재'인데 난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쇼가 주장한 평등은 이와 달랐다. 서로가 다르다는걸 전제로 하고, 기존의 것들은 거의 대부분이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여성다운 것'이나, '여성적인 것'들의 정의 또한 남성들의 정의이기 때문에 남성적인것도 아니고, 여성적인것도 아닌 '그 무언가'에 주목한 평등이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나는 내 기존의 생각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일라이자'의 '여성성'은 분명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여성성'이란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무언가였다. 왜냐하면 내가 기존에 습득하고 배우고 익히 들어왔던 '여성성'은 그야말로 남녀에 구분지어진, 그것도 아주 오랜시간전부터 정의되어온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연약함, 수동적임 등의 정말 말도안되는 이미지들을 사람들은 '여성'이라는 단어에 생각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들은 최근에 시행되는 많은 '양성평등'교육에 의해서 잘못된 이미지라고 각인시켜지고 있긴 하지만 그건 매우 소수일뿐 아직도 사회 계층의 다수를 차지하는 30대 이상~초고령까지의 사람들은 '여성성'의 이미지를 남성성이 정의한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이후로는 아마 내 기존의 생각대로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앞으로는 남성과 여성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평등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단순히 '둘은 같다.'로 규정하는게 아닌, '둘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의 가치를 인정받는 부분에서 동등해야 한다'는 쪽의 의미를 좀 더 구체화 하고 싶다. 예를 들면, 남자의 목적성에 대해서 어떤 집단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에너지원이 된다는 점을 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여자의 관계성을 들며 집단의 친화력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끝으로 나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들에게 추천하고 싶고, 동시에 기존 사회의식을 버리고 앞서가는 '여자'로서 사회에 영향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다. 다양한 부분에서 내 가치관에 영향을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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