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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좁은 문'을 읽고, 앙드레 지드
    책/외국소설 2017. 3. 9. 18:45


    0.

    앙드레 지드, 내가 많이 읽어보지 않은 프랑스 문학의 한 작가 이름이다. 프랑스 문학은 왠지 좀 거리가 멀다. 프랑스어로 글을 쓴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몇 작품 읽은 적이 있지만, 원래부터 프랑스어로만 생활한 작가들의 글은 잘 모른다. 그냥 읽어보지 않았다. 플로베르나, 앙드레 지드, 에밀 졸라, 샤르트르, 기 드 모파상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잘 읽어보지 않았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뿐이다. 이상하게도 연이 없었다고 밖에 말을 못하겠다. 그런 이 작가들의 작품들을 우리 부모님 세대는 학창시절에 접했다고 한다. 특히 이 '좁은 문'은 유명했어서, 거의 대부분의 어른들이 읽었다고 설 때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래도 외가에서는, 내 나이 또래 치고는 문학 책들을 많이 접한 편이다. 한국 문학이야 정말 많이 읽었고, 세계문학도 조금은 읽었던 편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작가들은 위고를 제외하면 나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설에 외가에 갔던 그날, 읽지 않아서 모르는 이 작가의 한 작품이 '오래된 책' 그러니까 '세로 쓰기'를 한 책으로 발견되었던 그 때, 나는 이 작품을 읽어봐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복음 7장 13~14

    1. 이야기 구조

    책의 제목인 이 '좁은 문'은 위에서 언급한 가톨릭 성경의 마태 복음 7장에 나와있는 '좁은 문'을 가리킨다. 정확히 기억이 잘 나는 건 아니지만, 성당에서 이 내용이 한 번 복음으로 나왔던 적이 있었고, 나는 이 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좁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난다. 이 책의 이야기는 바로 이 '좁은 문'에 도달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좁은 문'에 도달하기 위해서 살아가던 주인공 3명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3명은 알리사, 제롬, 쥐비에르 이렇게 인데, 알리사와 쥐비에르는 자매사이이고, 알리사가 첫째, 쥐비에르가 둘째, 그리고 남동생인 로베르 이렇게 3남매, 제롬과는 친척 지간이다. 이야기는 '제롬'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하는데, 첫 번째 최상 대상은 바로 뤼실 비콜랭이다. 뤼실 비콜랭은 알리사와 쥐비에르, 로베르의 어머니이다. 제롬에게는 외숙모인데, 이 외숙모인 뤼실 비콜랭의 행동들이 자신의 어머니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가급적 '차분하게' 진술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후 뤼실 비콜랭이 다른 남자와 도망을 치고 나서는 제롬의 젊은 시절이 나타난다. 이 젊은 시절에는 알리사와 사랑하게 된 이야기와, 그런 상황에서 편지를 주고 받던 것, 쥐비에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갈등에 빠진 것, 이후 쥐비에르는 테시에르라는 어떤 구혼자와 결혼을 하고, 알리사와 제롬은 서로 사랑했지만 결혼하지 않는다. 이후 알리사는 어느 한 지역의 요양원에서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고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후 제롬은 알리사를 생각하며 쥐비에르를 만난다. 그곳에서 제롬은 쥐비에르가 그녀 집에 마련한 '알리사의 방' 안에서 쥐비에르의 딸인 '알리사'의 대부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제롬과 쥐비에르는 알리사를 회상하며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후의 이야기는 알리사가 남긴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2. 큰딸과 엄마, 그리고 알리사의 가톨릭적인 삶

    큰딸과 엄마의 관계는 참 묘하다. 많은 과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그 결론은 이렇다. 심리학자들은 첫째 딸이 엄마와 자아 동일시를 할 확률이 매우 높은 결과를 보였다고 했었다. '엄마'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면 딸도 행복하게, '엄마'가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첫째 딸 역시 그 다른 모습으로 따라간다는 연구 결과들이었다. 첫째 딸에게 있어서 집안에서 자신과 가장 모습이 비슷할 수 있는 대상은 '엄마'인데, 그 엄마의 모습을 동일시하고 학습함으로서 여성이란, 엄마란 어떤 존재인 지 학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이 작품에 적용시켜보면, 알리사와 뤼실의 관계로 인해서 알리사가 조금 엇나갔다고 볼 수 있다.

    알리사의 엄마인 '뤼실'은 제롬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금새 화려한 옷을 걸친다. 가슴이 드러난 옷이나, 색이 빨간 옷과 같은 다양한, 자신만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걸 두고서 제롬의 어머니는 저럴 수는 없다며 비난을 하는 상황이었다. 이윽고 뤼실이 자기가 집에 들였던 '젊은 장교'와 도망을 가 버리자, 알리사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욕망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톨릭을 믿는 알리사는 자신의 욕망이 종교적인 삶의 실현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것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으며 어떻게 하면 이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있는지 고민하지만, 그녀가 택하는 길은 완전한 금욕적인 삶, 마치 스토아 학파의 삶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금욕적인 삶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그녀가 세우는 롤모델은 제롬의 어머니라고 파악할 수 있다.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제롬의 어머니는 뤼실의 행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롬의 아버지가 죽은지 정확히 얼마만큼 시간이 지난 것인지는 나도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단지 뤼실의 어머니가 제롬의 어머니로부터 한소리 들었다는 것과, 알리사는 자신의 고모인 제롬의 어머니를 이해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가톨릭 성경에 대해 아주 해박한 편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성경이 추구하는 도덕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는 몇 개 정도를 언급할 수 있다. 이 도덕적인 삶에는, 베푸는 삶, 용서하는 삶, 남을 돕는 삶, 이기적이지 않은 삶, 다른 이들과 행복을 나누는 삶, 자신에게는 가혹하더라도 타인에게는 관대한 삶, 자신이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수양하는 삶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욕망에만 치우치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에만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지, 욕망 자체를 아예 배제한 삶을 살라고 하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리사가 추구하는 신실한 삶은 본래의 가톨릭적 삶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알리사가 추구하는 삶이 극단적인 금욕적인 삶에 해당하기 때문에, 제롬은 한 때 서로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알리사는 자신이 선택한 금욕의 길로 나아가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 소설의 문제 의식은 결국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제목인 '좁은 문'은, 주인공들이 살아갈 때 생각해야하는 일종의 지침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제시한 삶의 형태는 인물로 파악해볼 수 있다. 크게 인물이 3명 등장한다. 그중 쥐비에르는 자신의 언니와 제롬 오빠와의 결혼을 생각하며 원치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가면을 쓴 삶을 산다. 알리사는 자신에게 내재된 본능적인 욕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어머니의 일탈로 인해 말미암은 죄의식이 자신을 강하게 짓누르는 상황에서 택한 나름대로의 선택을 묵묵히 따라가는 삶을 살아간다. 제롬은 참 서술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롬은 이 소설에서 가장 잘 드러나지 않는 인물형이다. 제롬이 주인공이지만, 그가 알리사와의 관계에서 결정을 내리는 부분들을 보면, 대부분은 알리사의 결정을 따르는 형태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제롬이 수동적인 인물이라기 보다는, 그가 알리사와의 관계에서 알리사의 선택을 상당히 존중했던 결과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함부로 평가 절하를 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또한 제롬은, 알리사가 죽었다고 해서 그녀를 잊은 상황이 아니었음을 소설 내용의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소설의 내용이 제롬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제롬은 인물형을 드러내는 데 초점이 있다기 보다는 서술자로서의 역할이 더 강하고, 동시에 알리사의 사고와 행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게 아닐 까 싶다.

    나는 이쯤에서 의문을 가진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이고, 추구해야 하는 삶인지 말이다. 원칙적으로, 나는 그 누구의 삶도 가치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혹 자신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한 때 나의 가치관은 알리사와 비슷했었다. 물론 그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나는 종교적인 가치 떄문에 금욕적인 삶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뭔지 모를 통제하기가 상당히 힘든 내재된 본능적 욕망을 느끼고 난 이후부터는 과연 이 욕망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그 방법 중 하나로 한 때 금욕주의의 삶을 추구했었다. 욕망의 표출은 처음부터 성숙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고, 그 표출의 형태 또한 정제된 형태 보다는 다소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로 발현한다. 이런 욕망을 두고서 나는 처음에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가는 이 욕망을 아예 발현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는 금욕주의의 삶을 선택했었다. 이게 정답이 아니었던 이유는, 금욕이 해결방법으로는 부적절해서였다. 마치 흐르는 강물을 보로 막아버려 썩어버리고 있는 강들과 같이 말이다. 그리고 금욕주의를 계속하다보니, 어느 순간에는 흐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고, 지금은 조금씩 흘려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다양한 모습들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긍정하는 게 좀더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더 크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은 바로 '나에 대한 관점'에 있다고 본다. 다르게 말하면 자아개념 정도. 결국 내가 내 스스로를 받아들이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의 문제이다. 욕망을 느끼는 내 모습도 나의 일부분이라고 받아들이는 그 순간, 내가 이 부분을 감춰야겠다,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줄어들고는 했다. 알리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좁은 문'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그녀가 목표로 했던 삶이 그녀의 어머니 '뤼실'과는 다른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본다면, 이런 아귀들은 조금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욕망을 추구하는 삶이 도덕적이지 못한 삶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평생 자신과 싸워왔다고 파악해볼 수 있었다.

    좁은 문을 10대에 읽고나서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서 성찰할 기회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정확한 건, 나는 10대에 위와 같은 생각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10대 후반부터 시작했던 고민이 지금에서야 어느정도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이 책이 10대에 읽고 끝날 책이라기 보다는, 더 이후에 드는 많은 생각과 고민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람이 살아가는데에는 절제와 조절이 필요한 가운데 적절한 해소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월에 쓰기 시작한 글을 이제서야 마치는 건, 게을러서이기도 하고, 글이 잘 안쓰이기도 했다. 이걸로 겨울방학에 읽은 교양 서적 책 읽고 글쓰기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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