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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버닝'(Burning)을 보고
    영화 2018. 6. 15. 23:27

     

    버닝을 본 지는 오래되었으나 글을 좀 늦게 쓰게 되었다. 쓰고 싶었으나 쓰는 것을 미루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고 느껴진다. 솔직히 글을 쓰고 싶었으나 버닝의 여운을 조금 느낀뒤에 감정이 정리되고 나서 글을 쓰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을 뿐이다. 이번 글은 '이창동 감독', 영화적 기법, 내용, 영화를 보고 나서 드는 나의 생각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영화를 해석하려고 이 글을 쓰지는 않았다.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더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최근 영화중에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들이랑 같이 영화관 안에서 같이 있던 건 처음이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리얼리즘 영화에 관심이 많았나 하는 의문과 함께 말이다. 솔직히, 어느 시점 이후로 나는 수 많은 대중 영화들을 관심 없이 그냥 넘겨버렸다. 블랙팬서도 어벤져스도 데드풀도 무관심 등 나의 영화 취향과는 그닥 관계 없는 영화들만 해서였다. 이유라면, 슈퍼히어로 영화가 마치 신데렐라 스토리의 변형물인 것 마냥 과도하게 범람하고 같은 형태로 반복을 이루다보니 지겨워졌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 이틀이어야지, 계속 그것만 보는 것도 질리고 재미없고 판에 박혀서 돈이 아까웠다. 예측 가능한 서사에서 재미를 찾기란 나에게 힘든 일이었다. 최근에 본 클레어의 카메라나 플로리다 프로젝트,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런 판에 박힌 것과는 달랐다. 소재도, 이야기도, 그리고 이번에 본 이창동 감독의 '버닝' 역시 그랬다. 지루함이라는 감정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 마냥 나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영화였다


    1. 이창동 감독이라는 명성

    한국 영화 감독들 중에서 '이창동'이라는 감독이 차지하는 위상은 어디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단 하나 확실한 건, 그가 '리얼리즘'을 추구해온 영화 감독이라는 것이다. 리얼리즘에도 층위가 많지만, 그는 정말 '극 사실주의'를 추구한다. 변형되고 왜곡된 현실을 그려내는 걸 하지 않는다. 인상주의나 낭만주의처럼 현실의 아름다운 면이나 순간적인 면들을 포착하는 것도 하지 않는다. 그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삶 그 자체를 그렸다. 그리고 그 '삶'이란 영화적인 주인공이 아니라 일상적 주인공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전의 영화 몇 편들을 조금 살펴보면 막동이(초록 물고기), 영호(박하사탕), 신애(밀양), 미자(시) 와 같은 주인공들이 나타나는 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이 '일상적'이라는 점이다. 산업화 속의 소시민이었고, 518을 겪은 소시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시를 쓰고 싶어했던 여인이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하나 같이 일상적인 주인공을 소설처럼 '영화'로 만든 이창동의 색이 듬뿍 베어있다. 감독의 명성을 '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분명 이창동의 영화는 일반적인 '소설'과 같은 영화로 읽어야 하는 영화들이기 때문에 더더욱 리얼리즘 감독이면서, 작품을 낼 때마다 상을 쓸어갔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런 '이창동'이라는 감독의 명성이 이번 영화의 어떤 홍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의 영화 트렌드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는데, 요즘 영화시장은 일종의 수요 공급 곡선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중영화 시장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벤져스도 보지 않고 쥬라기 공원도 보지 않는다. 어떤 메시지를 읽어낼 만한 영화들이 아니며, 그 영화들은 일종의 시각적인 재미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약 2시간 남짓한 감정 상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창동 영화는 감정 상품이라는 용어로 불리기에는 일종의 고급 요리다. 그것도 평소에 먹어보지 않아서 맛을 잘 모르며, 오히려 맛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는 그런 요리들이다. 나는 이제까지 트러플이나 캐비어, 송로버섯 요리를 먹어보지 않았으니 그런 요리들로 비유하면 될 것 같다. 그 요리들을 먹었을 때 과연 나는 그 요리들이 맛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상하다고 느끼겠지. 마찬가지다. 이창동의 영화는 그 격이 높음에도 대중들의 입맛에는 별로인 영화다. 그래서 이 '명성'과 영화의 내용 및 관객들의 수용이 대치된다. 아무리 트러플과 캐비어가 비싼 요리인들, 삼겹살에 길들여진 사람들의 입맛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버닝'만큼은 이창동이라는 감독의 명성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고 본다.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더할나위 없이 바뀐 세상에서 이창동의 영화는 유행처럼 번졌으나 불이 붙지 않은 것이다. 묘하게도, 스마트폰이 나오기 시작했던 2010년도에 그는 '시'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로부터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며 또다른 대중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에는 단 한 번도 감독으로서 작품활동을 하지 않았다.


    2. 영화적 기법

    시기적으로 요즘 나오는 영화들중에서는 '버닝'처럼 롱테이크와 몽타주를 지속적으로 노출하는 경우가 드물다. 몽타주는 상당히 고전적인 기법이다. 이걸 본격적으로 영화에 사용한 건 러시아의 영화감독인 에이젠슈타인이다. 몽타주 기법을 통해서 그는 다양한 대상들의 연속적 배치를 통한 의미 전달을 암시적으로, 동시에 세련되게 이루어냈다. 문제는 이러한 영화적 기법인 '몽타주'가 오늘날의 한국 관객들에게 너무 어려운 기법이 되었다는 것에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의 한국 영화는 시장에서의 공급과 소비의 개념으로 접근하게 된다. 시간과 감정을 소비할 수 있는 '유흥과 상품'의 일종으로 여겨져 있다. '영화'라는 예술 장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과자나 커피같은 일반적인 소비재로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란 특이한 '음료'이다. 사람들은 직설적이고 어렵지 않은 이야기 전달 방식인 아메리카노나 프라푸치노를 고르지 에스프레소나 필터커피를 잘 고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극 중 '벤'(스티븐 연)이 종수에게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고 베이스를 느끼라고 하는 말처럼, 대중들은 벤의 사고처럼 '즐기며 사는 것'을 원하지 종수처럼 '진지하게 사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공감하지 못하는 게 나는 당연한 일로 보인다. 정작 벤의 삶은 수수께기로 가득하고, 종수의 삶은 반복되고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상들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은 이전에 찍었던 그의 영화들에서도 그랬듯이 직접적인 이야기 전달을 거부했다.

    이창동 감독은 예전부터 영화적 기법을 잘 보여준 사람 중에 한 명이다. 대표적으로 역순행적인 영화 구성을 보여주는 박하사탕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액자식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정말 보기 드문 한국 영화의 실험작이니까. 게다가 근본적으로 '직접적인 이야기 전달'은 영화와도 배치되며 현실과도 배치된다. 서술자를 두는 영화가 아닌 이상, 그저 보여주는 방법을 띈 영화이기 때문에 이창동 감독은 주인공인 '종수'마저도 그냥 보여주었다. 그리고 종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한 '현실성'에 있어서도 그만의 치밀함으로 다양한 부분들에서 사실적인 부분들이 보였다. 종수의 핸드폰(루나), 옷, 녹슨 트럭, 방치된 고향집, 밥먹는 것, 자위, 벤의 집에서 찾는 화장실, 그리고 대마초를 피우지 못하는 것, 거의 비슷한 옷, 그리고 택배 기사라는 직업 등등 많은 것들이 종수라는 인물을 구현해내기 위한 하나하나의 장치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이런 걸 사람들이 잘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 가치가 빛이 바랜 것 같다고 느꼈다.

    내 경우, 종수가 만약에 아이폰 X를 들고 다니는 택배기사였으면 아마 영화를 보며 납득이 안갔을 것이다. 종수는 가난한 인물인데 가난한 인물이라면 가난한 인물이 들만한 전화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아이폰 X를 쓸 수 있나 했을 것이다. 하루하루를 택배기사로 살아가는 종수가 140만원짜리 핸드폰을 들고 다닌다는 건 뭔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감독의 리얼리즘을 나는 마음에 들어했다.

    롱테이크가 영화 곳곳에 나와서 뭘 이야기 하면 좋을까 싶은데, 두 가지 롱테이크가 좋을 것 같다. 하나는 해미가 노을 앞에서 그레이트 헝거를 생각하며 보여주는 춤사위다. 왜 그레이트 헝거냐고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다만 해미는 어느정도 리틀헝거를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가 '벤'을 통해서 그게 일정부분 해소되고, 그 후에는 그레이트 헝거의 형태로 춤을 추었다고 보았다. 새가 날아다니는 판토마임의 형태로 그레이트 헝거가 나타나는 점에서 인상적인 장면이고, 하늘이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점점 변해가는 장면을 직접 카메라로 잡아주는 신이 이어지는 부분을 통해서 해미는 종수의 집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했었던 시절을 회상한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다른 하나는 영화 마지막에서 종수가 벤을 죽이는 장면을 언급할 수 있다.


    3. 내 생각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는 판단이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종수가 옳고 벤은 그르다는 판단이나, 해미가 가장 잘했다는 판단 등의 '결론'은 무의미하지 않지만 옳은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냥 하나의 '길'이고 삶의 방향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종수의 삶과 벤과 같은 삶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벤과 같이 못살 것 같다. 벤은 일상의 모든 것들에서 따분함을 느끼고 공감을 하지 못한다. 그는 영화속에서 나오는 용산 참사와 관련된 전시회장에서도 식사를 편히 하는 일종의 '부유하는 사람'에 가깝다. 삶에 열기나 생명력이 없으며 일상이 따분하고 노는 것 밖에 없는 삶 속에는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타인들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지점들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영 내키지 않았다. 과연 타인들의 고통까지도 소비해버리는 모습들로 내가 비쳐지고 싶냐고 물어보면 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물들을 그저 관찰하고 즐기지만 공감과 소통에는 나아가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어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종수의 삶은 조금 다르다. 종수의 삶은 분명 가난하지만 남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고 지내온 삶이다. 아버지의 삶을 바라보며 많은 일들이 있음에도 집으로 돌아오며, 아버지의 마지막 재산인 '소'를 보냄으로써 과거를 매듭짓고 정리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보일'이라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타인들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종수의 삶이 조금 더 괜찮았다고 느꼈다. 종수의 삶은 소설 쓰기를 통한 자기 표현을 그려내는 삶이었다. 마지막에는 그런 자기 표현을 하는 공간으로 '유일하게 햇빛을 본' 해미의 방을 택한다는 것 또한 나는 뭔지 모를 공감을 했다. 팍팍한 삶을, 오늘날의 많은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이 종수의 모습에서 해미의 방이라는 작은 행복한 공간도. 영화 초반부에 해미의 방에서 '햇빛'을 보는 장면을 통해서 해미의 방은 종수가 유일하게 '행복함'이라는 감정을 인식하는 공간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해미의 방에서 지속적으로 자위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위를 마치고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소설쓰기'는 일종의 자기 극복이라고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4. 글을 마치며.


    포르쉐와 포터가 기억나는 밤이다 강변북로 주행씬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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