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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이자 비평가, '버나드 쇼'사람들/위인 2013. 8. 26. 19:33
19세기 영국의 희곡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세상을 떠난 후에도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렇게 될줄 알았지.’ 라는 묘비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1856년 7월 2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1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대부분의 가톨릭신자와 다르게 몇 안되는 개신교 신자였다. 경제적인 능력은 없어도 아일랜드인답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었고 버나드쇼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유머감각을 키워나가기 시작한다.
한편 어머니는 버나드 쇼의 예술적인 감각을 키워주었다. 직업가수였던 그녀 자신 역시 어머니로 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진 못했지만 예술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심어주는데에는 성공했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과의 사이를 예술로 채우려는 듯 음악과 미술에 열을 쏟았다. 어머니가 미술관과 박물관, 오페라와 고전을 가까이 한 덕분에 어머니는 예술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기를 수 있었는데 훗날 예술의 다방면에 대한 평론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이 같은 어린시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머니는 버나드쇼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개인교사를 불러 성악레슨까지 하게 했는데 버나드 쇼는 훗날 이때의 이 레슨이 연설가로서 대중앞에 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지만 라틴어 교육을 제외하면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고, 자주 전학을 다니는 버나드 쇼는 처음 입학한 웨슬린 칼리지에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후, 명문 사립학교, 공립학교로 전학하지만 어느곳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생활을 포기하게 된다. 결국은 독학으로 학문을 익히게 된다.
"나는 선천적으로 경쟁에 약하다.
칭찬이나 표창을 받고싶지도 않다.
따라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험따위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만일 내가 이긴다 해도 나의 기쁨보다는
상대방의 실망하는 모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반대로 내가 진다면 나의 자존심이 상할것이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15살의 나이에 학업에 포기한 버나드쇼는 자신의 학업에 실패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며, 1871년부동산 중개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한다. 시간이 날때마다 독학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 일을 계속했다. 어느덧, 4년의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두딸만 데리고 런던으로 이사간다. 버나드쇼 역시 20살이 되던 이듬해,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어머니가 있는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 런던으로 시작한 20대 초반은 부푼꿈과는 달리 가난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때 에디슨 전기회사에 취직하기도 하지만, 1년도 지나지 않아 회사가 경쟁사에 합병되어 그마저 자리를 잃게 된다. 이후 그는 작가로 자기잡기 까지 10여년동안 아버지의 가족 연금과 어머니의 레슨비에 기대 생활하면서 작가수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낮에는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저녁이면 런던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모임에 나가 강연을 듣고 토론에 참여하면서 버나드쇼는 런던에서의 하루하루를 보냈다. 당시 런던은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모든게 달라지고 중산층의 지적열기가 한층 높아지던 때였다. 20때의 버나드쇼는 그 모든 변화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관찰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 지적호기심이 넘친 20때 청년들이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빠져든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즈음, 자주 참가하던 모임에서 사회주의자인 시드니 웹과 화가이자 공예가인 윌리엄 모리스 마르크스의 딸 엘리노와 같은 이들을 만나 우정을 나누고, 시인 쉘리가 그랬던 것처럼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훗날 남성들이 동물을 괴롭히고 살해하고 고기를 먹는 한 인류는 계속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던가 채식 때문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 두렵다. 그것이 채식주의의 유일한 단점이라고 말할 만큼 극단전인 채식주의자였다. 오랫동안 글을 쓰며 작가데뷔를 위한 준비를 하던 그는 1879년 자서전에 가까운 소설인 '미성숙'을 출판했는데 빅토리아 시대의 신랄한 비판을 한 이 소설은 50여년 후에야 빛을 보게 된다. 이후 그는 5편의 소설을 완성하지만 어떤 작품도 출판사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랜 습작의 결과인 소설이 출판사로부터 외면당하자 자신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된 그는 이야기보단 '대화체'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소설가가 아닌 극작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옮기게 된다.
"저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쓰든
제가 쓰디쓴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을 꼭 강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의 본래 능력이 크게 과장될지도 모릅니다.
사실상 저는 손톱만큼도 타고난 천재가 아니고
기지가 넘치기는커녕 영리하지도 않습니다.
제작품은 철저하게 정직한 노역의 결과입니다.
그 노역은 미숙하게 짝이 없는 소설쓰기에서 부터 시작해
25년 동안 매일 꾸준히 계속됬습니다.
제 비범한 작가경력에 대해 쓰신다면
부디 그 비범함이 평범함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든 작가지망생들에게 밝혀주십시오.
꿈을 꾸거나 예술적인 과자를 섭취하며 시시한 시인처럼 산게 아니라
채소장수처럼 살아왔다는것을 강조해주십시오."
훗날 극작가로 성공한 버나드 쇼는 실패를 거듭하던 자신의 습작시절을 돌아보면서 전기작가 아츠볼트 핸더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출판사의 계속된 거절에도 집념과 열정으로 글쓰기를 계속하다가 그는 1882년 9월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준 미국의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연설에 감명 받아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풀어보려는 마음으로 현실참여에 나선다. 1884년에는 시드니 웹 등이 주도해서 만든 사회주의자들의 모임 '페이비언 협회'에 참여하는데 이 협회는 혁명이 아닌 생활속에서의 작은 변화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려는 온건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버나드 쇼는 청중을 매료시키는 강연자로 떠올랐다. 그는 강연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원이나 거리 어디에서나 즉석에서 무료 강연을 펼쳤다. 그가 예술에 대한 비평을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이다. 입센을 영구에 처음 소개한 연극 이론가 윌리엄 아처의 소개로 신문에 서평을 실었고 월드지에는 미술평론을, 스타지에는 음악평론도 실었다. 음악에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그의 칼럼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게 그의 목표였다.
"사람들은 내 비평이 개인적인 감정에 입각해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감정을 개입시키는 것이 잘못된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개인감정이 빠진 비평은 읽을 가치가 없다.
그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모름지기 비평가라면 개인의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자기만족에 빠지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내 감수성은 개인감정이란 말로는 불충분 하다.
그것은 바로 열정인 것이다. 예술적 완성을 향한 열정,
다시 말해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고귀한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 말이다."
여러 신문잡지를 통해 음악평을 발표하던 버나드 쇼는 1890년 자신의 비평관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특히 오페라 비평에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재능 있는 비평가로 자리 잡았고, 곧이어 극작가로서도 주목받는다. 입센을 신선한 현대극의 창시자로 여겼던 버나드 쇼는 1891년 '입센주의의 정수'라는 글에서 이렇게 이상주의를 비난한다.
속물은 추악함을 정신적인 고통 없이 받아들이는 자이고
이상주의자들은 그 추악함을 견딜 수 없어
이상으로 현실을 가리고 사는 자기 기만적인 사람들이다.
그는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둔 새로운 스타일의 희곡을 선보인다. 1892년 상영된 처녀작 '홀아비의 집'은 빈민문제를 재조명해 영국 극단 최초의 문제작으로 떠오른다.
30대 중반에 들어서야 극작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자신의 길을 찾은 버나드 쇼는 이전까지의 연극작품에 등장하던 인물들의 판에 박힌 듯한 성격을 정반대로 묘사하면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 질문을 가진다. 도시빈민의 문제를 다룬 데뷔작 홀아비의 집에 이어 1893년에 발표한 ‘워렌 부인의 직업’에서도 여성의 입장에서 매춘부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 경제적인 모순에서 찾았다. 때문에 이 작품은 모든 극장에서 상연 거부를 당했지만 극작가로서의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이렇게 소설이 아닌 희곡에서 반응을 얻기 시작한 버나드 쇼는 무기와 사람, 운명적인 남자,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등, 전쟁물과 역사물, 삼각관계와 가정사를 다룬 작품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면서 1년에 한 두편씩의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뿐만 아니라 평론가로서도 독보적인 활동을 보여 1895년부터는 주간지인 ‘세터데이리뷰’에 연극 비평을 맡아 4년 가까이 고정 칼럼을 기고하며 영국의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또 그의 빼어난 대중 강연 실력은 영국 노동당의 출범과 ‘페이비언 협회’가 지지하는 후보를 돕는 선거운동에서 빛을 바랐고, 시드니 웹과 함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를 설립하며, 그의 활동에는 한계를 느낄 수 없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작가 수업을 보낸 20대의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희곡의 집필과 연극 비평,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참여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활동으로 30대를 보낸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에 붉은빛의 턱수염을 가진 큰 키의 버나드 쇼는 과로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사소한 상처도 외과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는 결국 세터데이 리뷰의 연극비평란을 ㅎ후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극작쪽에만 몰두하기로 한다.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일을 줄이게 됬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평생의 반려자를 얻게 되는데 건강때문에 고생하던 그를 헌신적으로 간호한 샬롯과 1893년 결혼식을 올린다. 한살 아래였던 그녀는 같은 아일랜드 출신에, 페이비언 협회였던 웹 부부와도 절친이었고 부유한 상속녀였다. 사실 버나드 쇼는 평생동안 많은 여성들을 사귄것으로 유명한데 젊은 시절에는 너무 가난해 연애를 할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작가로서 자리잡은 후로는 재치 있는 입담덕분에 주변의 여성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는 주로 편지로 여성들에게 마음을 전하곤 했다. 결혼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여배우 엘렌 테리와는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서간집을 펴낼 정도였다.
지금까지 인간은 오로지 종이 위에서만 영광 아름다움 진실 지식 덕망 사랑을 성취해 왔다.
이렇게 서문에 쓰며 말이 아닌 글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내가 된 샬럿 외에 엘렌 테리, 페트릭 켐벨 같은 여배우에 대한 버나드 쇼에 대한 사랑은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 때문이라고 해석되는데 이런 경험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기존 관습에 벗어난 여성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42살에 결혼식을 올리고 건강도 회복한 버나드쇼, 이때부터 그는 전성기가 시작된다.
‘인간과 초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극히 우아한 예술적 환경에서 나온 작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저는 아침에 그 작품을 쓰고 오후나 저녁에는 런던시 자치 의회에 나가서 하수도, 도로포장, 가로등 설치, 지방세, 사무원 월급 등 골치 아픈 문제와 싸우곤 했습니다. 이 작품이 가족용 뮤지컬로 구상된 다른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극작가로 자리 잡은 버나드 쇼는 이제 그의 대표작이 되는 작품들을 차례로 선보인다. 그는 전기작가에게 쓴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20세기 초 연극계의 길이 남을 작품, '인간과 초인'의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닌 시기에 썼는데, 때문에 1901년 집필을 시작한 작품은 1903년에서야 완성되었고, 작품이 무대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후였다. 이 작품은 모짜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모티브를 빌린 것이 가장 큰 특징으로 오페라의 피날레에 흐르던 음악을 그대로 집어넣는 듯, 돈 조반니에서 받은 영감을 여러 부분에 담아냈다. 그는 오페라에서 사후세계로 그려지는 천국과 지옥을 서로 반대되는 가치관이 통하는 각각의 세상으로 표현했고, 더해 지옥을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묘사해 이전까지 사람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뒤흔들었다.
돈 조반니에서 모티브를 얻은 버나드 쇼의 작품 인간과 초인의 성공에 이어 더블린의 에디극장 상연을 위해서 쓴 ‘존 불의 다른 섬’을 발표했는데 영국에서 에드워드 7세를 위해 특별공연을 펼칠 정도였다. 뒤이어 선보인 ‘바바라 소령’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면서 화제가 되었다. 구세군으로 대표되는 종교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작품을 두고 일부 비평가들은 종교적 감수성의 절실한 요구를 배반한 작품이라고 혹평했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소신을 응원했다.
버나드 쇼는 주제면에서 종교적인 열정을 담은 최초의 희곡을 탄생시킨 작가다, 그의 성공은 어떤 비평가도 깎아내릴 수 없는 완전한 승리다. 이미 런던의 유명인사였던 그는 ‘바바라 소령’을 둘러싼 비난과 찬사로 더 유명해졌다. 자신을 둘러싼 유명세와 조금 거리를 두기 위해서 그는 1906년 런던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에이엇 세인트 로렌스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했다. 쇼 스코너라고 이름붙인 이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여생을 보냈는데 자녀가 없던 이 두 사람은 대신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그렌빌 바커같은 배우 몇명을 양자로 삼기도 했다.
버나드 쇼의 작품들 가운데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1912년 작품 '피그말리온'일 것이다. 훗날 뮤지컬로, 또 오드리 햅번 주연의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모습을 바꿔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다. 그는 5막에 '로맨스'라는 부제를 붙이고 음성학에 대한 교훈극임을 강조했다. 상영당시 모두 118차례나 공연될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언어학자 시긴스가 일라이자라는 인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사회변화를 위해서 교육을 강조해온 버나드 쇼의 생각을 잘 담아냈다.
선한 사람이 선한 의도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해서 바로 알고 현실을 바탕에 두고 추론해야 한다.
우리가 현실 문제 다룬 정치과학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진실과 교훈을 배운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말이다.
1914년 연극 피그말리온 이 런던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둔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은 1차세계대전에 휩싸인다. 당시 버나드 쇼는 58살, 전선에 나가 싸우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이 전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글 쓰는걸 잠시 멈추고 '전쟁에 대한 상식'이란 글을 발표하는데 ‘영국에게도 독일 못지 않은 전쟁책임이 있으며 각 민족들이 너무 애국적이고 그릇된 영웅주의에 물들어 전쟁을 낭만으로 여긴다’고 비판한 그의 글 때문에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된다. 비애국적이라는 이유에서 말이다.
이후 평화와 협상을 요구하며 전쟁을 반대하던 그의 연설은 검열을 거치면서 삭제되기 일수였고 급기야 그는 극작가 협회에서 추방까지 당한다. 이 모든 압력에도 버나드 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참전한 영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그를 친독일주의자로 내몰던 사람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이 되자 반대로 그를 자랑스런 인물로 떠받들었다.
버나드 쇼는 전쟁 중에 겪은 경험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 교훈적이고 대사가 많던 그의 작품들은 상징이 많이 등장하는 우울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버나드 쇼는 스스로 최고의 작품이라고 여기는 '상심의 집'이라는 작품에서 전쟁을 일으킨 세대의 정신적 파탄을 그렸고, 시와 산문이 결합된 '메투셀라로 돌아가라'라는 인류의 역사를 다룬 작품에서는 인간도 노력에 의해 신과 같은 정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창조적 진화론을 펼쳤다.
창작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느끼던 버나드 쇼에게 다시 한번 의욕을 불어 넣어준것은 1920년에 거행된 잔다르크 시성식이었다. 그에게 잔다르크는 순교자이기 보단 인류의 가능성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새로운 여성상이었다. 그는 이런 시작으로 ‘성녀 조안’을 집필해서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성공은 1925년에 노벨문학상으로 이어진다. 스웨덴 한림원은 버나드 쇼의 작품을 선정한 이유로 '그의 작품엔 이상주의와 인도주의가 깃들어 있으며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풍자와 뛰어난 시적 아름다움이 곳곳에 숨어있다.'고 말했다. 버나드 쇼는 노벨문학상 수상을 처음에는 거부했지만 나중에 '상만'받게 되었다. 그가 거부한 상금은 영국 스웨덴 문학협회에 기부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사실주의에 뿌리를 뒀던 극의 분위기를 바꿔 상징주의 극을 시도하며 집필을 계속했고, 1년에 30여차례에 가까운 강연은 물론 왕립희곡 아카데미와 같은 학술모임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1931년 70이 넘은 나이에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고 사회주의에 빠져있던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내 샬럿이 원해 세계여행을 가는데, 이 여행길에 인도에 들러 간디를 만났다. 그는 버나드 쇼를 '순수한 영혼을 간직한 영원한 젊은이'라고 표현했다. 버나드 쇼 부부는 인도에 이어 실론, 싱가폴,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방문한 뒤 미국에 다다른다.
수십년 전부터 여러차례 미국의 초청을 받았지만 그는 미국인과 영국인들이 서로 반감을 가졌다고 생각해 미국방문을 미뤄왔다. 그 결과 1933년에 되서야 처음 미국땅을 밟았다. 당시 미국에서는 버나드쇼가 사회주의에 대해서 쓴 책을 전차안에서 읽다가 감옥에 갇힐 정도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는데 3500명에 이르는 대중앞에서 펼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강연은 그의 진면목을 선보인 기회가 되었다.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버나드 쇼는 여행에서 얻은 영감으로 다시 작품활동에 정열적으로 매달린다. 인간과 예술, 사회, 정치에 관한 다채로운 작품들이 이 시기를 장식한다. 한편 1938년에는 '피그말리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이로서 그는 노벨문학상과 아카데미를 모두 받은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이듬해 버나드 쇼는 요통과 관절염에 시달리는 아내 샬럿과 영국 동부해안의 프린턴에 머물다가 제 2차 세계대전 소식을 듣는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그는 신문과 방송을 분석해 다시 한번 평화협정을 강조하는 글을 발표했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1차 세계대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비난과 무대에 오른 작품에 대한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느낄 수 없었다. 아내 샬럿의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아내는 강한 정신력을 가진 여성이다. 그는 하루에도 12번씩이나 자신의 의견을 내게 주장한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강한 샬럿이 병으로 고통 받는 것을 지켜본 버나드쇼는 그녀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썼다. 그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샬럿은 1943년 9월 12일 눈을 감고 만다. 떠나는 그녀를 위해 버나드 쇼가 준비한건 그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헨델의 음악이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땅값과 세금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하루 16시간씩 일해야 하는데도
자신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굉장한 자유를 누린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가정과 학교에서 그렇기도 했고
신문과 라디오 의회 법정 선거연설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모든 사회적 가치와 명예를 옹호한다고 진짜로 믿는다.
그러나 실제 투표장에서는 게으름, 낭비, 사치, 비굴함, 가난, 노동착취 등
이기적인 자본이 만들어낸 모든 악덕에 표를 보낸다.
1944년 88살이 된 버나드쇼는 모두가 알아야할 정치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사회를 읽어낸다. 당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극작가로 큰돈을 버는 부자인데다가 여러 채의 집과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음에도 그는 유상몰수를 통한 토지 국유화와 부자나 귀족들의 세금으로 소득평등을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유의 독설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곤 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의 그는 예의바르고 관대했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에 따뜻하고 감상적인 면을 잃지 않는 인물이었는데 이런 양면성은 영국과 아일랜드 , 가톨릭과 개신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서로 반대되는 가치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형성됬다고 할 수 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 상실감 때문에 건강이 더 나빠진 그는 저택에 칩거하며 정원 가꾸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무 가지를 치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생긴 후유증을 1950년 11월 2일 아내의 뒤를 따랐다. 당시 그의 나이는 94살, 평소 인간은 자아완성을 위해 오래 살아야 한다던 그의 주장에 어울리는 긴 생애였다. 70년에 이르는 긴 창작기간동안 사회전반에 이르는 다양한 글과 냉정하게 현실을 담아낸 희곡들로 현대 연극에 크게 기여한 비평가이자 극작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