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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하엘 엔데, '모모'
    책/외국소설 2011. 4. 3. 01:20

       미하엘 엔데 '모모'라는 소설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 나오게 되면서 유명세를 탄 소설이다. 하지만 내가 이 소설을 이 드라마서 나오기 전에 우연히도 부모님이 사주셨기 때문에 나름 '순수한 자세'로 읽었다는 점에서 나는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을 여러번 읽은 후에 느끼는 부분이지만, 단순히 이 소설을 '시간'의 개념에 관해서 이야기 하려는게 아니다. 약간은 사회 비판적 느낌까지 지니고 있는게 바로 '모모'라는 소설이다.

       '시간'을 하나하나 쪼개고 쪼개서 '초'단위로 센 다음에 이것에 대해서 '가치'를 언급면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시간'에 종속되게 만드는 상황들은 처음읽었던 당시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서는 정말 힘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중학교 3학년때만 해도 아직 '시간'에 관한 개념이 모호했고, 이렇게 소중한건지(지금은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지만, 소설에서 말하는 '시간의 소중함'과는 좀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모르고 있던 때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느릴수록 빠른것이다.'라는 말이 진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느릴 수록 빠르다.'라는말 자체는 정말 맞으면서도 틀린말이다.(모든말에는 분명 양면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양면성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은 조금 위험하긴 하다.) 어떤일을 하는데 있어서 빠르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것은 아니라는걸 여러번 느꼈고, 실제로도 봐았으니까. 하지만 그런다고 반드시 느린게 좋은것만은 아니더라. 정말 빠르게 행동해야 할 때임에도 '느릴 수록 빠르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하면서 내가 해야할 이들을 제때 하지 않았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산업화가 되면서 현대사회는 점점 '개인화'되어가고 있었다. '모모'는 이러한 '개인화' 되어가는 사회의 일면을 돌려서 잘 표현했다. 사람들이 일에 쫓겨서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상황은 마치 오늘날의 사회와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 소설 자체의 상황은 2011년도가 아니다. 적어도 10년은 지났을법한 느낌은 든다. 다만, 이 '개인화'라는 문제 자체는 그때에도 변하지 않았을거라는 '작가의 의도'가 어느정도 숨어있던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그러한 의도를 소설 전반에 펼쳐놓았다.

       잘 듣는것이 어떤것이냐 하고 묻는다면 난 '모모처럼 듣는게 잘 듣는거야.'라고 말한다. 2명의 친구, 한명은 '거짓말'이 가득한 친구, 다른한명은 '철학가'적 기질을 지닌 친구이다. 이 둘은 모모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그들은 즐거워하고, 모모역시 즐거워한다.
     
       사실 난 듣는데 익숙해진지 오래되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어서 갑자기 듣는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해져서, 나중에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이끌어 내고 싶을때 어떤 말을 던져야 하는지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도 큰 차이점은 없다. 다만, 올해들어서 내가 나의 의견을 좀더 '표출'하려고 한다는걸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난 내 의견을 표출함으로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모모는 나와 많이 다르더라.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의견은 거의 나오지 않는게 모모였다.(소설속에서 말을 안하는건 아닌데, 모모는 분명 말을 적게한다.) 왜 모모는 이렇게 행동했을까...하는 의문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나라는 '종족'이 이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걸까? 그 부분은 내가 스스로 고찰해볼만한 문제이지만, 당장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듣기'라는 행위는 단순히 어떤 사람의 말을 '듣기'하는게 아니다. 어떤의도로 말하는지, 왜 말하는지, 지금 그 사람의 기분은 어떤지, 하고싶어서 이말을 하는것인지 이런 소소한것들이 '말하기'에 녹아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기'를 하면서 그 화자를 조금씩조금씩 알아가게된다. 나는 타로점을 배웠다. 이 타로점을 배운 이유중에 하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들고 나는 그걸 들어주고 싶었다. 물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타로를 한건 아니다. 나름 '해줄만한 사람'들에게만 했다. 나는 어릴때부터 왜그런지 몰랐지만 여린면이 있어서, 상처를 쉽게 받았다. 지금은 무덤덤해진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가끔 크게 상처를 받을때가 있다. 내가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어 일궈낸 일에 대해서 악담을 들을때 그런 상처가 더 심해지는것 같다. 그래서 난 이 상처들에 관한 이야기를 남들에게 잘 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내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 믿을만한 사람이라면 난 말하곤 했다. 지금까지 5명정도?? 난 그들에게 내 소중한 이야기를 말하면서 나름대로의 편안함을 느꼈다.그리고 난 이 편안함을 남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타로는 그렇게 해서 나의 일부가 된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듣기'에 대해서도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내게 여러번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내 친구들중에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친구들 만나러 가서는 나(어머니)는 앉아만 있고 다른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한단다. 왜이렇게 자기 이야기들을 그렇게 속속들이 말하는지 이해가 되진 않지만, 나(어머니)는 말이 적은 타입이어서 자주 듣고 온단다. 그래서 네(나)이야기는 거의 없지." 이 이야기처럼 현대에 와서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고, 누군가가 들어주었으면 하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실제 들어줄만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래서 '듣는 친구'를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또, 그런이유에서 어머니가 자주 친구들을 만나시는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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