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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수, '무정'
    책/한국문학 2014. 4. 26. 16:18


     



    무정

    저자
    이광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5-11-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세기 이래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읽고 가장 자주 출간을 시도한...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세차 병진 유월 이십구일 오전 두시에 죄인 박영채 읍혈백배

    - 박영채가 형식에게 보낸 편지 -



       최근에 소설을 읽은지가 오래되었다가, 간만에 이 소설하나로 글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글 자체는 좋았다. 아무래도, 이 작품의 시대문화적인 배경과, 작품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성격과, 글을 읽고 나서 작품의 구조에 대해 드는 생각들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할 말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 '안나 카레리나'를 읽으면서 소설의 두 축인 '레빈'과 '안나 카레리나'가 각기 다른 서사 구조의 주인공으로 나타나 조금씩 조금씩 겹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물론 이 생각을 하게 된 그 뿌리에는 무정에 대한 논문을 읽으면서 무정이 '영채'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생각하게 된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건지 무정과 안나 카레리나의 서사구조를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무정에 나오는 인물들의 성격과 배경에서 나타나는 것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내가 당시 사회와 결부시켜 말해보고 싶은 것들을 좀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 소설은 연구자에 따라서 계몽소설로 볼 것이냐, 연애소설로 볼 것이냐 하는 두가지 초점의 차이로 구분된다. 전자의 경우는, 형식과 선형, 병욱과 영채가 모두 '교육'과 '유학'을 통해서 사회적 배경인 조선을 개화/계몽시키려고 하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 소설을 통해서 제한된 상황하의 민족적 선택중 최선의 선택을 하기위해서 노력했었는데, 그게 바로 소설에서 이런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연애소설로 보는 관점은, 형식과 영채, 선형간의 삼각구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사가 연애소설의 기반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비중이 더 큰 여자는 선형이 아닌 영채이며, 영채는 형식과 거의 비등할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그 기본은 어쨋든 영채와 형식의 사랑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연애소설'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연구자의 관점은 이 정도로만 소개하도록 하고, 이번 '무정'에 관한 기록은 크게 서사구조 및 고소설과의 연계성, 인물, 근대적인면과 한계, '이광수'라는 배경을 살펴보는 순서로 살펴볼까 한다. 먼저 서사구조 이다.



    1. 서사 구조 및 고소설과의 연계성


    읽은지 1달도 채 안된 무정에서 읽은지 1년이 넘은 안나 카레리나를 떠올리게 된 건 바로 '서사구조'때문이었다.


     이형식

    (영웅소설)

    박영채

    (기녀 애정소설, 여성 수난담) 

     콘스탄틴 레빈

    안나 카레리나 


    구원자 모티프 : 박진사, 김병욱

       기막힐 정도의 두 소설의 연관성은 바로 '서사구조'의 주체가 두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런 생각은 순전히 쌓고쌓은 결과인듯 싶다. 어쨋거나, 여러가지의 논문과 책을 읽으면서 넓혀진걸 이렇게나마 가끔씩 체험하는건 괜찮은 일이 아닐까 한다. 어쨋거나, 이 두 서사의 축인 두명이 잘 만나지 못했다. 형식과 영채, 레빈과 카레리나 두쌍 모두 말이다. 물론, '부활'에 나오는것처럼, 마슬로바와 네홀류도프가 두 이야기를 각자 했던게 같은 작가에서 있었지만, 그마저도 '부활'에서는 네홀류도프를 위주로 서사전개를 해왔기 때문에  해당이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안나 카레리나'는 완전히 두개의 축이 존재했고, 두 사람이 만나는 횟수와 각자의 서사구조를 이끌어가는게 추진력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안나 카레리나'에서는 안나와 레빈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사랑해버리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자아의 붕괴와 현실적인 사랑의 추구를 말한다면, 레빈은 브론스키로 인해서 키티와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은뒤에도 여러차례 고민과 고민 끝에 결혼하면서 자신의 종교관과 미래의 농업에 대해서 고민한다. 장장 3권이나 되는 서사에서 레빈과 안나는 몇차례 만나지 않으며 둘은 형식과 영채와는 달리 어떠한 친분도 크지 않다. 다만, 두 축은 각자의 서사를 구축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점이 크다. 안나가 죽음을 통해서 서사를 마무리 짓는다면 레빈은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형식과 영채는 이와는 좀 다른데, 애초에 이 둘은 어린시절을 같이 보낸 것으로 묘사된다. 이건 흔히 한국의 고소설에서 볼 수 있는 서사구조라고 할 수 있다. 두 인물이 어린시절에 알고 지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들 고소설을 읽으면서 접해보았다. 다만, 어른이 되어서 만나는 횟수가 약 3번밖에 안된다는점과, 의외로 쪽수는 많은데 전체 서사 일수는 한달도 안되며 약 14일 내외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레빈처럼, 형식도 자신의 서사이야기를 스스로 끌고 나간다. 그 서사구조의 대부분의 이야기는 영채와 연관되었다는 점이 약간 다르긴 하나, 고소설의 영웅소설 구조와 비슷하게 구출양육형 인물인 박진사를 만나고, 쟁서형인물인 김장로를 만나면서 형식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위한 서사구조를 밟아간다. 다른점이라면, 영채와 어른이되어 처음 만났을때, 둘의 감정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지 않았고 이를 통해서 형식을 두고서 '햄릿형 인물'이라고 말하게 된다.

       영채는 고소설의 기녀 애정소설이나, 여성 수난담의 형식이 많이 들어가있다. 어린시절 아무일 없이 잘 살다가 한순간에 가세가 기울고 여러가지 수난(몸팔림, 평양 여로 서사)을 겪는다. 그러고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서(효) 기생이 되지만, 오히려 이 선택은 아버지가 목숨을 끊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이는 기존의 전근대적 서사에서 일어났던 '효'의 실천을 통한 실현이 이루어지지 않고, 서사구조가 붕괴됨을 일컫는다. '효'를 실현하려 했던게 결국은 불효를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기생이 된 영채는 '기녀'로서 삶을 살아가며 아버지가 연을 이어준 형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영채가 형식을 만났을 때, 형식은 매우 애매한 반응을 보였고 자신 또한 신분적인 제약이 걸려 형식과 살지 못함을 깨달으며 장애가 극복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애정소설, 수난담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영채는 '구시대적 가치'가 '신시대적 가치'로 변모하는 인간형 그 자체로서 형상화 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될 부분이다.


       간단하게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형식의 이야기는 크게 영웅소설적 구조를 따라간다. 영웅소설에서 주인공은 어려움을 겪다가 구원자를 만나 그 구원자를 통해 '구출,양육,혼례'를 거치고 실력양성을 통해서 자기가 속한 집단 혹은 국가를 '영웅적으로'구한다. 형식 또한 박진사라는 구출양육자를 만나 교육을 받다가 어느 한 사람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에 다녀오게 되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김장로'라는 쟁서형 인물을 만나 선형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삼량진의 수해라는 급변하는 전개속에서 선지자적인 면모를 보이며 모음운동에 나선다.

       영채는 먼저 기녀 애정소설적인 측면이 있다. 춘향전에서 등장하는 '옥가락지'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해석할 수 있는 '언문 종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광수는 독자층이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를 적절히 배치했다. 또한 박영채가 겪는 '수난'은 숙향전에서 숙향이 고난을 겪게 되는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여기에서의 차이점이라면, 보통 기존의 고소설들은 이런 수난과 애정의 고통끝에 수난으로부터의 해방, 혼례성사라는 긍정적인 결과로 전개가 되는데 '무정'에서는 이광수가 이를 인지하고 서사구조를 뒤집어 엎었다는 것이다. 이광수는 영채가 죽으러 간뒤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영채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더 뒷받침해준다고 볼 수 있다.

       병욱은 '구원자'형 인물인데, 흔히들 고소설에서 주인공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인물로 구원자가 등장한다. 어떠한 여성성도 보이지 않는 신여성이며 영채가 병욱을 통해서 단번에 생각이 변한다는 점은 '무정'이라는 창작물의 한계점이지만, 어찌됬든 영채가 '신여성'으로 변모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인물로 생각된다. 이런 인물은 고소설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며 주인공을 돕는 인물로 나타난다. 박진사와 김장로도 형식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자형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물


    앞에서 형식과 영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 두 인물은 생략하고 신우선, 배학감과 김현수, 김장로, 김병욱, 김선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먼저 신우선부터. 신우선은 지나식 교육을 받은 '한문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스스로가 이형식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매우 호쾌한 남자로 묘사되는데, 일본유학도 했지만 근본을 봉건제 당시의 사상으로 둔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배학감과 김현수는 '폭력성'으로 대변되는 근대성의 이면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김장로는 돈이 많은 부자이지만 서양의 지식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김병욱은 '신여성'그 자체로서 작품에 등장하는데 김병욱의 존재는 구원자이면서 영채에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다만, 여성성이 거세된것처럼 묘사되며, '계몽'이외의 것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보이는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선형, 선형은 참으로 애매하면서 가장 확실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선형은 집안 자체는 근대적이지만, 자신의 성격은 근대적이지 않다. 그녀는 결혼을 주체적인 문제로 파악하고 접근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가치에 몸을 맡긴다. 한명, '흔들흔들 거리는 노인'은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비중이 없지만, 이 노인의 상징적인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노인은 '전근대성'이 남아있는 그 자체로서 여전히 조선사회에 전근대적인 사람들과 행위, 가치가 남아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게 되는 서술자의 도구로서 작용한다.

    '무정'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다. 이 인물들은 각기 조선의 계층을 대변하고 있다. 이형식은 동경 유학생이라는 조선인중 지식인을 보여주고, 병욱은 당대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인 '신여성'에 속하며 김현수 같은 놈은 배웠지만 배운대로 행동하지 않는 '폭력성'을 상징하고, 박영채는 근대적인 가치를 추구하려 하지만 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이광수는 어떻게 하면 전근대적인 요소들과 근대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섞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한 그의 능력은 정말 높이 평가할만 하다.

    두번째는 바로 '정'의 표현이다. 이광수는 자신이 문학이란 것에 대해 정의하면서 문학을 더이상 봉건적 가치에 얽메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기존의 전근대적인 '문'이라 함은 사상과 가치의 표현도구였다. 그릇이었다. 성리학의 윤리를 표현해내는 도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이를 타파하고자 하였고, 부분적으로는 성공했다. 그가 생각하는 그 만의 나름대로의 이상세계를 여기에 투영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그 서사성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가치있는 시도였던 것이다.





    3. 근대적인 면과 소설의 한계


       '무정'의 근대적인 면은 바로 내면심리묘사로 보여지는 갈등구조가 드러났다는 점이다. 그 출발점은 바로 형식이다. 형식은 수없이 고민한다. 선형을 택할 것이냐, 영채를 택할 것이냐를 영채가 죽었다고 판단하기 전까지 고민한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형식은 전형적인 '햄릿형'인간으로 평가받는다. 만약 형식이 이렇게 고민하지 않고 영채를 다시 보자마자 '영채씨 우리 결혼합시다!'이렇게 했으면 이건 전혀 근대적인 인물이라고 평가받을 수 없다. 하지만 형식은 고민했다. 정절이라는 가치에 영채를 재면서 갈등했다. 영채가 관계를 했는가 안했는가로 그는 고민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근대적인 인물인 것이다. 고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은 봉건윤리를 최우선가치로 생각하고 이를 따르려 한다. 유충렬전의 유충렬은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충'과 '열'을 따르려 했고, 임경업전에 나오는 임경업 또한 영웅적인 면모를 보이며 당시의 시대적 가치인 '충', '효', '열', '예', '의', '신' 등을 따른다. 시대적 가치를 내면화한 인물이 바로 전근대적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형식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영채는 '열'과 '효'를 내면화 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경우, 가치의 내면화가 그녀의 가치를 높여주지는 못했다. 그녀가 효와 열을 내면화 했음에도 그녀의 아버지는 옥에서 나오지 못해고 그녀는 기생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더 이상 전근대적인 가치에 대한 숭배가 사라지고 현실에서의 도움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무정'은 한계점도 존재한다. 첫번째로 '이데올로기적 봉합'을 들 수 있다. '무정'에서 소설 전개가 급변하는 점은 바로 '삼량진의 수해'에서 나타난다. '삼량진의 수해'는 이광수가 소설속에서 '계몽주의'를 녹아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는데 이는 소설의 서사 구조 속에서 아주 뜬금없이 등장한다. 어떠한 개연성도 주어주지 않고 갑자기 등장하는 이 '삼량진의 수해'는 작가가 '계몽주의'즉, '교육'이 필요한 조선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면서, 그를 통해 교육만이 답이다는 것을 말하려는 부분인 것이다. 여기에서 봉합하는 건 바로 '계몽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이며, 이 이데올로기는 영채와 선형, 형식간의 갈등구조를 무마시킬정도의 봉합력을 지니고 있었다. 제대로 된 근대 소설이라면 영채와 선형, 형식간의 갈등구조를 이런식으로 없애버리진 않았겠지만, 이광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계몽주의'를 앞세우다보면서 정작 소설의 서사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덜 비중을 두게 된듯 하다.




    4. '이광수'라는 배경

      이광수는 어린시절을 고아로 보냈던 사람이다. 그가 능력이 뛰어났고 매일신보에 독자적으로 장기간 연재를 할 만큼 능력은 뛰어났던건 맞다. 하지만 어느 작가든 자신의 성장과정을 무시하고 소설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피그말리온과 인간과 초인을 집필한 조지 버나드 쇼 역시 자신의 어린시절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서 다양한 여성상을 추구했던걸 보면 이광수 또한 자신의 고아 떄 기억을 영채와 형식에게 투영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11살이 되던 해에 부모가 콜레라로 목숨을 잃으며 그는 가까운 친척집에서 생을 보내게 되지만, 그의 불편함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으며, 자신이 배워온 성리학적 가치에 대한 심한 회의를 느낀다. 또한 이후에 '신돌석'과 같은 의병장군이 주위 사람들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잡혀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었다.

       또한 그는 실제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자신이 실제로 선생직을 수행하고 난 뒤에 쓰여진 '무정'이기 때문에 '무정'속의 이형식은 어느정도 이광수의 대리자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5. 개인적인 느낌

      이광수의 '무정'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들었었다. 이 소설은 그때 처음 접했던 당시보다 더욱더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 때는 단순히 근대적인 첫 장편소설로서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아무런 구체적인 형상없이 그냥 '무정'이라는 단어로 남아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내가 일은 '무정'은 생각보다 재미있고 신기하고 읽을만한 소설로 다가왔다. 아무도 '무정'이 이런 소설이다고 길게 이야기 해준 사람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이렇게 많이 찾아보고 읽을 자료가 많은 소설도 당분간은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좀 더 다양하게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어머니 말씀처럼 '유정'과 '사랑'을 읽어야 이광수의 '사랑'에 관한 소설을 다 읽는거라는 기억도 있고.. 괜찮았다.

       다음에 글을 쓰게 될 책들이 몇개 정해져있는데, 하루빨리 읽고 하루 빨리 관련 논문들을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글쓰면서 논문을 읽는게 도움이 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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