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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흙’을 읽고책/한국문학 2014. 12. 18. 15:57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광수의 '흙'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한다면, '무정'과 비슷한 서사구조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가 짬뽕되어 있고 거기에 덧붙여 농민 운동이라는 상당히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왔다고 하고 싶다. 이광수의 '무정'을 읽으면서 나는 상당히 이 소설이 괜찮은 소설이라고 느꼈었는데, 그 이유에는 형식이 바로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햄릿형 인물이라고도 배웠었는데, 이러한 우유부단함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이 어떻게 결정을 내릴지 궁금하게 만든다. '흙'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어떤 부분보다 우유부단하는 장면이 가장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이광수의 작품은 대개 '틀에 박혔다는'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비슷한 내용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번 작품 역시 그런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을 좀 더 편하고 쉽게 읽었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그러나, 비슷하다고 해서 완전히 같은 소설은 절대 아니다. 어쨌든 전에는 없던 '농민운동'이라는 소재가 들어왔다. 물론 이로 인해 '고향'과 비교를 당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대개 이광수의 현실 인식이 너무 떨어진다는 내용인데 이 부분은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일단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와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하고, 그 후 이 소설의 구조적인 측면과 비판점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 소설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보며 글을 마칠까 한다.
1.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와의 상호 텍스트성
유독 이 소설에서 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떠올렸다.. 다수의 장면들이 마치 내가 '안나 카레리나'의 오마주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흡사했다. 마침 찾아보니 연구 논문도 있는데, 눈문의 내용은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내가 느끼면서 어떤 점이 유사한지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면 이런 걸 들 수 있다.
톨스토이 – 안나 카레리나
이광수 – 흙
알렉산드로비치가 안나를 용서하는 것
허숭이 정선을 용서 하는 것
콘스탄트 레빈이 농촌에서 농민들을 살려야 한다고 하며 농촌으로 돌아가 농부들과 같이 농사를 짓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장면들
허숭이 농민 운동을 통해서 조선을 살려야 한다고 하며 농부들을 돕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살여울을 사람들의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
안나 카레리나가 자살을 하기 위해서 기차에 뛰어드는 장면
정선이 자살을 하기 위해서 기차에 뛰어든 장면
안나 카레리나는 '안나'가 브론스키라는 군인을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서 결혼한 가족도 내팽개치고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물론 안나 카레리나의 서사구조가 '안나'뿐 만 아니라 '레빈'이라는 또 다른 인물이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흙'과 완전히 유사한 것은 아니지만, 이광수의 '흙'의 인물들의 태도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의 태도는 상당히 흡사하다. 위에 표에서 제시한 것처럼 허숭이 정선을 용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계기는 바로 '흔들리지 않고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데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비치의 태도와 같다. 알렉산드로비치는 아내의 불륜을 알고도 종교적인 차원에서 용서를 한다. 쉬운 일이 절대 아님에도 알렉산드로비치는 안나가 무섭다고 느낄 만큼 억제력을 보인다. 이는 정선이 허숭에게 느끼는 것과 흡사했다. 정선 역시 허숭이 자신을 상대로 화를 내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것을 보고서 더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허숭을 두려워 한다.
두 번째는 바로 '농민'들에 대한 태도이다. 레빈은 직접 자신의 영지로 가서 농부들과 같이 일을 한다. 낫을 들고 풀을 베는 일을 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레빈과 비슷하게 허숭 역시 자신이 살여울에서 지내는 것이 조금 더 괴롭고 고되긴 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만족감이 자리한다. 이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면서 말이다. 차이점이라면 러시아의 경우 식민지 구조로 인해서 농촌이 파괴된 것이 아니었지만, 조선의 경우는 식민지 지배구조로 인해서 농민들이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상적인 부분의 자유에서도 러시아보다는 조선이 더 압박이 심했을 것이기 때문에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정근이라는 인물의 개입과 같이)
세 번째는 여자 캐릭터가 기차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는 그간 자신의 삶에서 느낀 회의감, 절망감, 좌절감으로 인해 기차에 뛰어들어 죽어버린다.(뛰어들어 죽는 장면은 매우 감상적으로 그려진다. 안나의 시각에서 뛰어드는 것으로 묘사가 되어있다.) 정선 역시 자신이 겪은 도덕적 붕괴와 삶에 대한 의지 상실로 인해서 기차에 뛰어들었지만 맥박이 남아있고 그 결과 병원으로 실려가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 후 살아남게 된다. 또한 정선의 죽음은 정선의 시각에서 보여지지 않으며 허숭의 시각에서 다루어진다. 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의 죽음은 서사구조의 한 축을 종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정선의 죽음은 이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진 않다. 왜냐하면 '흙'을 읽으면 알겠지만 소설의 한 축을 '정선'이 이루지 않는다. 허숭이 겪는 고뇌를 중심으로 서울과 살여울에 대한 이야기이며, 살여울로 오고 나서는 살여울을 지키는 허숭과 그걸 훼방 놓은 '정근'의 이야기가 된다. 이렇듯 '흙'의 여성은 대상화된 여성이다. 산월-선희-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어째서 이광수의 '흙'에 이렇게 비슷한 장면들이 나타난 건지는 좀 더 찾아봐야 하겠지만, 극 중 초반에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 괜히 나온 건 아니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 카레리나를 읽지 않았겠지만, 안나 카레리나를 읽은 후 '흙'을 읽는 다면 이야기하고자 하는 느낌과 장면들이 어떤 것들인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춘성, '이광수씨와 일문일답기', '신인문학', 1936.1
나는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문학은 인생에게 큰 위안으로 그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문학은 위안이 되는 동시에 불쾌가 없고 또 해가 없으며 따라서 인생을 보다 높은 경지로 한걸음 끌어 올립니다. 그것은 종교와 마찬가지요, 종교를 모르는 사람은 문학으로 대신할 수가 있다고 봅니다.
이것 때문에 책을 하나 빌려왔다. 톨스토이의 '예술이란 무엇인가'-예술론-라는 책을 읽으면 이런 이광수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광수 만의 인도주의적, 이상주의적 문학관은 자신이 이야기하듯 톨스토이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잠시 이 책의 본문을 조금 살펴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수백만 명의 노력이나 인명, 도덕까지도 희생으로 제공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가 현재의 여러 가지 미학에서 얻은 해답은 모두, 예술의 목적은 미이고 그 미는 우리가 거기에서 얻는 쾌락으로써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예술에 의한 쾌락은 훌륭하고 중대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귀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쾌락은 그것이 쾌락이니까 좋다는 말이 된다.
......
위대한 예술 작품은 그것이 만인에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기 때문에 비로소 위대한 것이다. 중국어로 번역된 요셉 이야기는 중국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석가모니의 이야기도 우리를 감동시킨다. 이런 일은 건축이나 회화, 조각,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예술이 감동을 주지 않는다고 해서, 관객이나 청중이 이해를 못 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결과로서 결론지어지는 것은, 또 결론지어야 할 것은, 이것이 나쁜 예술이냐 아니면 전혀 예술이 아니냐 하는 둘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톨스토이는 민중이 느낄 수 있는 예술을 꿈꾼듯하다. 이러한 영향속에서 이광수는 자신의 인도주의적, 이상주의적 사상을 키운것이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의 예술론에서 톨스토이는 하나의 예술이 만들어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동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그렇다면 그런 노동들까지도 예술로 부를 수 있냐고 묻는다.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문학에서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 예술임을 느끼지 않았나 싶으며, 그 예술을 통한 계몽이라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여담이지만 이 예술론은 내가 만약 미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다시 보게 될 것 같지만, 잘 안보게 될 것 같다.)
2. 인물들의 특성
권두연 교수님의 말씀처럼 소설의 인물들은 대개 각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인물도 하나의 '장치'에 해당한다.
1) 허숭
허숭은 무정에서 봤던 '형식'과 매우 유사한 인물이지만, '무정'과의 차이점이라면 허숭은 직접 농촌계몽에 뛰어드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또한 허숭의 형상이 '대장부'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 애초에 뜻이 크고 굵으며 옳은 일을 할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라는 점은, 이 소설의 전개가 매우 예상하기 쉽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나 허숭 역시 선배 변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본다면 도덕적 무게감이 항상 그를 짓누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도덕적 무게감을 스스로 잘 받아들이고 농촌계몽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광수 자신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라고도 평을 받는다.
2) 윤정선
정선의 생활상은 당시 신여성들의 퇴폐적인 사랑과 애정관을 엿볼 수 있는 통로이다.( 톨스토이 '안나카레리나'와 이광수 '흙'비교연구_김태녀_학술논총_단국대학교 대학원_1991) 정선은 결코 허숭의 사랑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가 진정 농촌 민으로서 규합하는 계기는 다리를 잃고 부모와의 관계가 끊어져 버린 상황에 있다. 허숭이 정선이 입원한 이후로 병간호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선은 결국 변화한다. 이런 정선의 변화 속에서 독자는 정선이 허숭과 뜻을 같이 했으면 하고 느끼게 되는데, 모든 인물의 시점 자체가 허숭의 시점으로 보아진다는 점에서 이는 지극히 당연하며, 대상화가 되어 있는 여성으로서 윤정선이 나타난다.
3) 김갑진
김갑진은 귀족집안 출신임에도 실제로는 돈이 그리 많지 않아서 부잣집 딸과 결혼을 목표로 하는 남자 중에 한 사람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조선은 답이 없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미국 유학생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도덕성을 상실해버린 몰락한 귀족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갑진이 작품 말미에 농사를 짓는다고 한민교 선생을 찾아왔던 부분은 갑진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 유순
윤정선이 부와 배운 사람, 도시 여성을 보여준다면 유순은 처음부터 가난함과 배우지 못한 사람, 시골 여자를 대변한다. 유순은 처음부터 조선 여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표현하면서 그다지 부정적으로 그려내지는 않는다. 무정의 '영채'와 비슷하지만 또 다르다. 유순의 죽음은 숭고한 희생으로 살여울 공동체가 발전되는 밑거름이 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또한 당시 힘이 없는 여성상을 유순을 통해서 보여준다.
5) 한민교
한민교(선생)는 허숭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와도 같은 인물인데, 지식인층을 규합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도 살여울로 내려 오기 전 말년에는 수입이 끊겨 매우 빈한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자신에게 배웠던 제자들이 처음 1,2년은 뜻을 같이 하지만 점점 사회와 세상에 물들어가며 결국은 한민교와 뜻을 같이 한 사람이 매우 적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민족운동을 하다가 힘을 다해버린 지식인을 대변한다.
3. 작품 구조 및 작품에 대한 비판.
이 소설의 내용은 크게 3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 별로 번호가 붙어져 있다. 이 소설이 연재소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1-1, 1-2, 2-1, 2-22 등으로 번호가 붙어 있다. 연재소설의 특성상 인기가 없으면 내릴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예로 이상이 일제시대에 연재했던 시나 소설들은 결국 '이게 무슨 시냐'와 같은 혹평 속에 내려졌던 걸 생각하면 쉽다. 그런 점에서 이광수의 소설은 상당히 통속적인 성격을 띤다. 이광수의 '흙'이 농촌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임에도 대중들에게 강력하게 어필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통속성'에 있는데, 연애과정 속에서의 인물간 갈등, 심리적 고뇌 등을 이토록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았다면 많은 독자들은 '흙'을 읽다가 외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통속적인 연애소설로 규정해야 하는 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엄연히 '허숭'이 살여울이라는 공간을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로 만들어 가려는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테마이다.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비판들은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비판들이다.
가장 많은 비판은 살여울 속에 숨어 있는 일제 수탈경제의 모습이 외면되며 농촌사회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그려졌다는 점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했다. 그 비판을 가져오면 이런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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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흙'의 시공간성 연구, 동남어문논집, 동남어문학회, 1992
따라서 살여울은 식민지 수탈경제의 본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고 있으며, 대립의 공간으로 설정된 서울은 식민지 지배구조를 형상화 해내지 못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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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인, '춘원연구', 동인전집 8, 홍자출판사, 1969
첫째, 이 작품은 구조 면에서 너무나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다. 춘원의 이전 작품인 '무정'이나 '번성'과 그 구조가 너무나 유사하며 근대 소설문학의 금기사항이라고 할 수 있는 우연적 사건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둘째, 작가의 현실인식이 불완전하다. 춘원은 농촌 실정에 어두웠다.
셋째, 작품의 주인공의 의도와 행동이 너무도 동떨어진다. 주인공이 의도하는 바는 농촌개량운동임에도 통속적인 연애문제 같은 데에다 한 눈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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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위선과 패북의 인간상', 세대, 1964.10
첫째, 작품의 주인공이 의도하는 농촌운동이란 것이 한낮 당시 지식인의 자기 기만과 에고이즘의 미화를 위한 위선적 행위에 불과하다.
둘째, 어거지 삼각 관계로 말미암아 소설적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셋째, 주인공이 현실을 직시하기를 거부한다.
나도 작품을 읽으면서 허숭과 정선, 갑진, 정근 등의 변화가 지나치게 우연적이라는 느낌을 읽는 내내 지울 수가 없었다. 이광수의 '부자연스러운 전개'에 대한 느낌은 이전 작품이었던 '무정'부터 지속적으로 나타나있었지만 이런 '결점'은 눈감아 줄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람이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계기가 있기 위해서는 엄청난 깨달음이 한 순간에 밀려오는 장면을 포착해주거나(불교에서의 '돈오점수'와 같은 깨달음이라면야..) 아니면 지속적으로 생각을 변화할 수 있는 '감화자'나 '교육자'등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광수의 '흙'에서는 그런 부분이 너무나도 적다. 정근이 작은갑에 의해 감화되는 부분이나, 허숭이 내내 고민하다가 한민교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깨닫는 부분이나, 김갑진이 어느새 농사를 짓고 있는 것 등은 뚜렷할 만큼의 개연성이 보이질 않는다. 물론 허숭의 변화나 정선의 변화는 지속적으로 고민하던 캐릭터가 결론을 내리던 것이니 납득이라도 하겠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그런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니어서 구조적인 '엉성함'은 더 전면에 드러난다.
두 번째는 바로 '농촌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아무래도 '고향'과 비교가 많이 되는데, 이광수의 '흙'에서 나타나는 농촌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환상적이고 미화되었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 이광수가 실제로 농촌에 가서 이 소설을 쓴 것도 아니며 농삿일 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말 그대로 너무 '미화'되어 있다. 그 당시에 이처럼 '조합'을 만들어 운영했다는 설정은 상당히 비 현실적이다. 아마 만들어서 운영하다가 끌려가서 상당한 고통을 받았을 리 만무하다. 아직 '고향'을 읽어보지 않아서, '고향'을 읽어보고 난 뒤에 현실성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할 예정이지만, 고향을 읽지 않은 나로서도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값어치가 떨어진다고 느낀 것은 아니다. 다음은 구인환의 평가이다.
구인환, '이광수소설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82
첫째, 이광수의 장인으로서의 소설 주법이 마음껏 구사된 작품으로 문학성이 매우 깊은 작품이다.
둘째,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귀농의식이 개인적 삼각 갈등과 집단적 대립갈등의 이원적 구조로 조선주의적 지향의식을 터 잡게 하는 뛰어난 작품이다.
셋째, 내용면에서도 식민지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광수를 두고서 이상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규정하는 데에는 바로 이런 '비현실성'이 한 몫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비현실성이 이상이고 그 이상은 미래의 긍정적인 모습을 그려낸다는 측면에서 값어치가 있을 수 있다. 구인환과 같은 연구자들은 이광수 만의 문학적 특성과 이상주의적 성격을 들어 '흙'을 이야기 한 게 아닐까 싶다.
4. 이광수의 '흙'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광수의 '흙'이 지니는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 분명 이 소설은 현실인식 측면에서 현실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으로 이 소설을 두고서 졸작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1) 이광수의 문학적 특성이 한데 나타난 작품
이 작품은 분명 이광수가 그 동안 생각했던 것들이 거의 다 녹아있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당시의 농민, 지식인, 유학생, 주재소, 치안 유지법 등 다양한 시대적 특성이 녹아있다. 어떤 소설이든 역사 보다 더 사실 같은 느낌을 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 '현실의 재구성'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광수의 소설적 특성인 계몽주의, 인도주의적 관점이 한데 들어가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는 주인공이 '허숭'이라는 점이 바로 한계이지만, 허숭은 좌우지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조합을 만들어 살여울을 살리려고 한다. 진정한 공동체로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하여 사람들의 변화를 꾀하고 살여울 농민들의 삶을 돕는 것이다.
2) 문학의 다양성 차원에서.
분명 비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당시 농촌사회에서 주재소의 압박을 벗어나고 농민들이 살아갈 길을 마련한다고 했을 때의 사회 모습을 그렸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문학에는 다양성이 존재해야 한다. 하물며 사람의 사상에도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는 이광수의 '흙'의 경우도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필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광수의 '흙'이 있기 때문에 이기영의 '고향'이 더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닐까.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은 모두 1930년대의 브나르도 운동의 한 일환으로서 창작된 작품인데, 이 운동에 대한 각기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5. 맺음말
당분간 이런 식으로 꾸준히 글을 쓸 생각이다. 얼마나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주에 2권이상은 읽고 한 주에 1편 이상의 글을 쓰고 싶다. 방학 동안 내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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