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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故) 이상의 예술, 최재서,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평론 2016. 8. 31. 08:24

     나는 이상의 소설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 관하여 친구와 이야기하거나 글로 쓰는 것도 내게 있어선 한 즐거운 일이올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이 추도회 석상에서 하게 되었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일인 동시에 대단히 거북하고 슬픈 일이올시다.

     나는 변변치 못한 몇 마디 말로써 고인에 대한 경애와 추억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나는 이상을 알기 전에 그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일종의 실험적 소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문단 상식과는 대단히 거리가 먼 이 소설에 놀라면서도 그 예술적 실험을 어느 정도까지 신용해야 할지 다소의 의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즉 이 작가는 이렇듯 괴상한 테크닉을 쓰지 않고서는 자기의 내부 생활을 표현할 수 없는 무슨 절실한 필연성이 있었든가 혹은 그저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위한 단순한 손장난이었든가 - 이런 점에 관하여 다소의 의문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김기림 씨의 <기상도(氣象圖> 출판기념회가 있었던 날, 회가 끝난 뒤에 나는 처음으로 이 작가와 만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에 영보 그릴에서 맥주를 나누던 유쾌한 기억은 지금도 이헌구, 정지용, 김기림, 김광섭, 치정희, 오희병 제군의 가슴속에 살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처음 보는 이상의 보헤미안 타입의 풍모와 시니컬한 웃음과 기지 활발한 스피치에 나는 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결코 인위적인 포즈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이상 더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내부 생활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그와 이야기하고 있는 중에 그가 우리들의 온량(溫良)한 생활은 벌써 예전에 졸업하였다는 것, 따라서 그는 상식에 싫증이 났다는 것, 그리고 결코 순탄스러워 보이지 않는 생활 가운데서도 문학적 에스프리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 등을 나는 알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오전 두 시 이후의 종로 일대에 관한 체험만 하여도 나에겐 놀라운데 더군다나 그 시니컬한 웃음엔 눈을 둥그렇게 뜰 일이었습니다.

     결국 이상이 실험적인 테크닉으로써 기괴한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유희거나 불순한 인기책이 아니라 그의 고도로 발달된 지적 생활에서 솟아나는 필지(必至)의 소산이었다는 것, 따라서 그의 예술적 실험은 그의 기막힌 생활이 갖추고 나설 표현 형식을 탐구하는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나는 안심하고 결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상의 소설은 어떤 점에 있어서 실험적이냐? 간단히 소감을 말하여 보겠습니다. 우선 (1)그의 소설은 소설의 전통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설이라면 으레 요구하는 성격 묘사라든가 플롯 같은 것을 그의 소설은 전연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날개>의 주인공에 특색이 있다면 무성격이 특색이겠고 또 그 소설엔 독자의 흥미를 끌고 갈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습니다. 그가 <날개>나 <동해(童骸)>나 혹은 <종생기(終生記)>에서 쓰려고 한 것은 외부에 나타난 행동과 생활이  아니라 일개인의 심리의 동태였습니다. 그의 소설에 비상한 물건과 사건이 나타나긴 하지만 그것들은 인물의 심리를 표시하기 위한 암호나 축문에 지나지 않고, 전통적 소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물건이나 사건 그 자체에 의미와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올시다.

     (2) 둘째로 그렇다면 그의 소설은 너무도 주관적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과연 그렇습니다. 그는 다만 주관적일 뿐만 아니라 실로 주관과 객관의 구별을 가리지 않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날개> 주인공의 올빼미와 같은 생활이라든가 혹은 <동해>에 있어서의 비논리적인 시간 관념이라든가 - 이 모든 것은 꿈과 현실의 혼동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그는 <동해>에서 다음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는 울창한 森林 속을 진종을 헤매고 끝끝내 한 나무의 印象을 훔쳐 오지 못한 幻覺의 人이다. 無數한 表情의 말뚝이 共同墓地처럼 내게는 똑같아 보이기만 하니 멀리 이 奔走한 焦燥를 어떻게 점잔을 빼어서 求하느냐.

     (3) 그러나 이렇다고 해서 이상에게 현실과 꿈을 식별하는 능력이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웃을 일이올시다. 그는 현실을 인식치 못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도 알알히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 가치를 적어도 그의 예술에 있어선 대수롭게 알지 않았던 것입니다. <날개>에 있어서의 금전과 상식과 도덕을 거의 매도하다시피 풍자한 것을 보면 그의 예술의 모티프가 나변(那邊)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예술을 말할 때 이 모티프를 떠나서는 말할 수 없고 따라서 이 근본 정신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의 소설은 드디어 어린애의 말장난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쉬르레알리슴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의식적으로 그것을 응용하였는지를 모르는 나로서는 무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4) 최후로 그의 작품에 소설이라는 명칭을 허가하여도 좋으냐 하는 질문이 당연히 제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자는 반드시 그의 소설이 소설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시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사실상 시와 소설을 결합하였다는 것은 이상의 소설의 가장 특이한 점이며 또 그의 실험 중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어가다가 다만 이따금씩 몇줄의 시를 발견할 뿐만은 아닙니다. 그 작품을 창작하 에스프리, 그 자체가 벌써 산문적이라기보다는 시적이올시다. 그리고 그의 문학적 에스프리는 늘 현실의 사말(些末)한 속박을 벗어나서 자유의 세계로 날아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해> 가운데 다음 같은 일절이 있습니다.

     나느 바른대로 말하면 애정 같은 것은 희망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결혼한 이튼날 新婦를 데리고 外出했다ㅏㄱ 다행히 길에서 그 신부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내가 그럼 밤잠을 못자고 찾을까?
     그때 가량 이런 엄청난 글발이 날라 들어왔다고 나는 은근히 희망한다.
     『小生이 某月某日 길에서 줏은 바 少生는 貴下의 新婦임이 確實한 듯하기에 通知하오니 찾아가시오.』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리고 안 간다. 밭이 있으면 오겠지, 하고 나의 念頭에는 그저 汪洋한 自由가 있을 뿐이다.

    「나의 염두에는 그저 왕양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이 한 마디 시를 아무 주저없이 토할 만한 작가가 현재 문학계에 몇 사람이나 될까? 나는 묻고 싶습니다. 그 아나크로니스틱한 이념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방약무인한 대담성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리해서 그의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 시라고 한대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전통적 형식을 깨드리고 모든 실험을 거듭하고 있는 현대에 있어 이상의 작품에 소설의 명칭을 거절할 이유도 발견키 어렵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상의 예술은 미완성입니다. 이 미완성이라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즉 그의 예술은 성질 그 자체부터 미완성적이라는 의미와 또 그는 일을 중(中)판들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어떤 완성된 형식 안에다가 자기의 주장을 집어넣으려는 전통적 작가가 아니라 현대 문명에 파양(破壤)되어 보통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개성의 파편 파편을 추려다가 거기에 될 수 있는 대로 리얼리티를 주려고 해서 여러 가지로 테크닉의 실험을 하여 본 작가올시다. 그의 작품이 이런 타입의 소설로서 어느 정도까지 완성한다치더라도 전통적 소설 개념을 가지고 본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미완성적이고 또 유치해 보일 것입니다. 그나마도 그는 그 실험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또 외부의 충분한 비판을 받을 일이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예술이 미완성이라는 것은 어느 점으로 보나 피(避)치 못할 운명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남기고 간 일에서 가치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시대의 비난과 조소를 받는 인텔리의 개성 붕양(崩壤)에 표현을 주었다는 것은 일개의 시대적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혼란한 시대에 있어서 지식인이 살아 나갈 방도에 대하여 간접적이나마 암시와 교훈을 주는 바 또한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자칫하면 상식과 저조(低調)에 빠지기 쉬운 우리 문단에 비록 어그러진 형식에 있어서나마 지적 관심을 환기하였다는 것은 그가 남기고 간 커다란 공적의 또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소설이 독자에게 구수한 흥미를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문학에서 흥미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경애하고 갈망하던 작가 이상은 멀리 객리(客裡)에서 쓸쓸히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양으로는 적으나마 그가 남기고 간 예술의 진의(眞意)를 해명하고 또 그 정신을 살려 가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관련해서 나는 그의 유족과 또 그와 친교가 있었던 문단 제씨에게 파란 많은 그의 생활의 기록이 하루 바삐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올시다.

     끝으로 고인(故人) 이상의 명복을 길이 길이 비옵나이다.

     <이 일문(一文)은 소화(昭和) 12년 5월 15일 이상 추도회에서 낭독한 그대로이다.>

    참고문헌

    -<문학과 지성> 인문사, 1938


    '에스프리'라는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왔는데, '문학적 에스프리'는 문학 정신, 문학적 자의식이라고 보통 해석합니다. 원래 단어는 프랑스어입니다.

    '쉬르레알리슴', 다시 말해서 쉬르레알리즘은 '초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작품들이 초현실주의적인 성격을 매우 강하게 띈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는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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