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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 더 하우스(Dans la maison)' 리뷰영화 2013. 8. 3. 19:32
광주극장으로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 갔다. 최근에 영화를 제대로 본 기억이 없어서 이 영화라도 좀 보고 싶었는데, 마침 그날 광주극장에는 내 고등학교때 영어선생님이셨던 '배종태'선생님이 떡하니 계셨다. 가끔씩 영화이야기를 해주셨던 선생님이셨는데, 하루종일 영화관에서 영화만 본 이야기도 있었고, 아마데우스와 같은 유명한 영화작품 이야기도 있었다. 잠깐 이 선생님 수업이야기까지 하자면, '학생주도형'수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영어 지문을 두고, 20~30분정도에 걸쳐 우리가 먼저 해석한 후에, 이걸 몇명의 학생들이 발표하고, 이에 대해서 선생님이 해설을 해주시는 방식이었다.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학생에 대해서는 엄벌이 처해졌지만, 나름대로 쿨한 수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선생님의 영화취향이란 다양했는데, 그날 이 작품도 그 취향에 들어가는 영화중 하나였나 보다. 우연이 글을 만드는것일까. 이 영화를 보기전 집에서 the good movie '색, 계'편을 보고 왔는데, '색, 계'가 파괴와 욕망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욕망'이 '파괴'를 하지만 끝은 알 수 없는 '긍정'속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샜는데 다른이야기를 접어두고, 이 프랑수아 오종이라는 프랑스의 영화감독, 나름대로 유명한것 같긴 하다. 나는 프랑스 영화라고는 '코러스'밖에 본기억이 없다. 음...아닌가, 다른것도 봤나, 아니다. 분명 난 '코러스'밖에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이 특유의 프랑스어는 나쁘지 않게 들린다. 얼마전에 봤었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프랑스어가 종종 들려서 그런지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언어'가 된것 같다. 장르는 스릴러, 내용은 발칙한 훔쳐보기와 동시에 훔쳐본 것들을 소설화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 될것 같다. 대개 '대담하다'고 할만한 장면들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욕망과 완벽해 보이는 가정속의 빈틈을 이야기 하려고 한건 아닌것 같다. 단지 이런건 스토리에서 보여지는 것들이고, 사실은 제자와 선생님간의 대화를 통해서 나오는 '상상'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이를 관객이 추측하도록 만들어 놓은게 아닌가 싶다.
클로드 가르시아를 맡은 에른스트가 잘생겨보인건 나 뿐만이 아닌것 같은데, 이 청년이 가진 얼굴의 매력은 동양인이 가지기 힘든 서양인의 '각진 얼굴'에서 비롯됬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아름답게 생긴코가 이 청년의 장점인데, 그로인해서 말하는게 굉장히 도전적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난 이게 가장 매력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절대 상대방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것, 그게 바로 '클로드 가르시아'가 선생님인 '제르망'을 대하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니까.
소설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는지가 이 영화의 주된내용이긴 한데, 소설을 쓸때 클로드는 자신이 본 '현실'과 자신이 행동한 것을 바탕으로 쓴다. 물론 소설은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속에서 벌어지는 플롯이라지만(최근에 소설의 이해를 읽다보니까 이런걸 이야기할 수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리얼리즘'이나 형식주의, 구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지고 이야기하려는게 아니다. 클로드의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 무언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걸 단지 '글'로 옮기고, 글로 옮기기 이전에 행동으로 옮겼을 뿐이다. 물론 이 영화에 나오는 소설의 이야기중에서는 '거짓'도 있다. 소설을 쓸때는 클로드의 친구 라파가 '자살'을 했다고 써서 선생님께 넘겨주는데,(마침 라파가 결석중이었고) 이에 선생님은 정말로 학생이 자살햇는지 집에 전화를 하고, '감기'가 심해서 오늘은 못나올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현실'과 '소설'(이야기,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져버린 상태의 영화속 장면인데, 왼쪽장면은 클로드가 에스더와 키스하는 것을 소설속에 써놓고 이에 제르망이 이게 '사실'인지 단지 '소설'뿐인지 묻지는 않은채 자신의 이 장면에 대한 평을 하는 부분이며, 오른쪽 장면은 클로드가 자신의 소설의 결말로서, '화목한 가정'이기에 자신이 침투할 공간은 없었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한 장면이다.(물론 영화속 소설은 이 장면으로 끝나지 않는다.)
훗날 자신의 과거가 '재능'없이 끝나버린걸 안타까워했던 제르망에게 당장 손재주는 좀 부족할지라도 엄청난 서사성과 표현력을 지니고 있는 클로드는 부러우면서 가르치고 싶어했던 대상임에 분명했을 것이다. 제자가 '에스더'의 집에 출입하기 위해서 결국에는 수학시험지를 훔치게 되고, 나중에는 이로인해서 학교로부터 퇴출처분을 받게되지만, 그 순간순간만 제르망은 자신의 제자에게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모든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제자의 재능을 자신의 재능처럼 여기는 '나르시시즘'은 바로 여기에서 나타난다. 자신의 일인것 마냥 자기 자식처럼 클로드를 대한 제르망에게 따분하고 지루한 수업보단 클로드와 '진짜'같은 '소설'이야기를 가지고 가르치는게 더 재미있어 보였다.
영화의 두번째 초점은 바로 '에로스'이다. 영화 초반부, 클로드가 제르망의 과제 결과물로 낸 글에서부터 알 수 있었는데, 클로드는 자신의 친구 라파의 어머니인 '에스더'에게 에로스를 느낀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라벤더 향기가 자신을 감싸 안았다고 표현하는 부분이나, 에스더가 창문에 커튼을 걸려고 하는 모습에서 느끼는 '이질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문구에서 나타나는 에로스는 '문자화된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고,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에스더가 소파에 치마를 입고 누워서 드러나는 무릎 약간위의 허벅지를 비추는 컷에서 나왔다. 또한, '향수'를 뿌리는 모습에서도 에로스가 나타났다.
내가 이 영화를 보기전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장면'을 에로스로 표현하고 싶어하는지 전혀알고 있지 못했는데, the good movie '색, 계'편을 보면서, 탕웨이가 향수를 자신에게 뿌리는 모습을 통해서 알게 된 후였고, 그때 봤던 그 느낌과 비슷한 느낌의 장면들이 '인 더 하우스'라는 영화에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는걸 알았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가지고 감독은 '금기시된 설정'을 통해서 '소설'로 만들어야 이루어질 수 있다는것을 충실히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에스더는 마지막에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그녀가 비록 가정에서 매우 행복한건 아니지만 뭔가 끈끈한것이 있는 것이다. 클로드가 에스더에게 '여자'로서의 사랑을 바란건 아닐것이다. 클로드는 자신의 어머니가 없기 때문에 '모성애'라는걸 경험해본적이 없고 이를 완벽한 가정속의 불행한 여인인 '에스더'를 통해서 받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에로스라는 이름으로 모성애를 갈구했지만 결국 그는 이사가는 에스더를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확실하게 이야기 하기 힘든 마지막 한가지가 바로 제르망의 부인 '잔느'이다. 제르망과 오랜시간을 함께했지만 아쉽게도 아이가 없고(영화를 다 보고난 추측으로는 제르망의 성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유산을 하거나일것 같다...정확한 이유는 언급되지 않아서 나도 알 수가 없지만, 영화 마지막에 클로드와 잔느가 잠을 잤다는 '암시'를 통해서 잔느가 성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어려운게 사실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갤러리도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다는 점은 근본적으로 '위험'이 깔려있는 상황에서 영화가 전개됬다는걸 의미한다. 또한 영화내내 제르망이 잔느의 '존폐위기'를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점도 뭔가 힌트라면 힌트가 될 수도 있겠는데....다음에 다시 볼 수 있으면 다시봐서 이해해 보고 싶은 부분이다. 한가지, 잔느도 클로드를 어느정도는 '사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스릴러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 영화를 포기할 수는 없었고, 그 결과는 생각했던대로 긍정적이었다. 보는내내 심장이 찢어질것 같지만 저번에 봤던 '블라인드'처럼 잔인하지도 않아서 비교적 웃으면서 볼 수 있었고, 영화를 보는 눈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서 그런지 이해할 수 있는 폭도 늘어났다는걸 느낀다. 그리고 새삼 프랑스의 교실은 한국의 교실과 다르게 '꾸밈없이 아름다움'을 지닌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