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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neras(Sidewalls) 리뷰, 번역판 :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영화 2014. 4. 20. 09:48
휴대폰은 우리를 항상 연결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세계를 침범했다.
- 영화 속 내래이션 -
한국으로 들여와서 제목을 번역하면서 이렇게 긴 제목으로 바꿔버리다니, 어떻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이라고 번역을 해버리는건지 난 개인적으로 싫다. 이 영화의 제목으로 저런 제목이 불가능하다는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이 아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사회 속에서 '소외된'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는게 이 영화의 주제이다. 그 이야기의 결론을 두 주인공의 만남으로 끝맺음 하고 있긴 하지만말이다.
이번에 볼 영화는 Medianeras, 영어로 sidewalls, 한국어로 말하면 건물의 옆 벽면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에 대해서 볼까 한다. 한국어로 번역된 '부에노스 아이레스 등등'이건 정말 아무것도 관련없는 제목이다. 어떻게 이런식으로 제목을 지을 수 있을까 하고 분노해봤지만, 내 생각에 이걸 배급한 배급사쪽에서 고용한 영화 번역가가 영화에서 말하려는 핵심에 접근하지 않고 '연애'에 관련된 이야기로 풀려고 하는 주관이 들어가서 이렇게 된 듯 싶다. 정말 안타깝다.
영화의 시작은 다양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건물들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다양하다'라는 말에서는 매우 괜찮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다양하다는 건 비슷하지 않고 다 따로따로 논다는 걸 의미한다. 이 도시는 유독 통일성과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피렌체나 베니스, 로마같은 도시들을 보면 빨간 지붕으로 건물 상층이 다 덮여있는 '통일성'이 보여지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주 무분별하게, 어떠한 계획도 없이 어떠한 일관성과 통일성도 없이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들을 여러샷으로 잡아낸다. 이 장면은 내가 본 그 어떤 영화보다도 도시의 삭막함과 각자의 개성, 어울리지 않고 따로따로 놀고 있는 현대인, 군중속의 고독 등을 상징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해냈다. 위 장면에서 보듯이 건물들은 그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게 정말 '난개발'로 대표되는, 급격한 산업화를 겪고 있는 현대사회의 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그나마 서울은 상당히 오랜시간동안 도시 계획을 통해서 조금은 통일화를 이루었다. 약간은 좀 비슷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북촌과 경복궁 앞 고층건물들은 잘 어울리지 않지 않는가, 그런걸 생각하면 좀 연상이 쉬울 것 같다.
EBS 다큐프라임중 '아파트 중독'이라는 주제로 다큐프라임을 했었다. 최근에 봤던 다큐프라임중에서는 가장 강력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다큐중에 하나인데, 거기에서 나왔던 '파리'의 전경 항공사진을 가져왔다. 파리는 위에서 봤었던 부에노스 아이레스와 같은 그런 '난개발'적 이미지가 주가 되지 않는다. 스카이라인도 매우 비슷비슷한데다가 색의 조합도 차분함에 약간의 주황색을 통해서 변화를 주고 있는 정도이다. 무엇보다 도시가 딱 봐도 깔끔하다. 건물이 어느정도 통일성만 있는건데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처럼 삭막한 느낌이 덜하다. 물론 파리의 경우 도시계획설계자가 건물을 짓는것에 대해 허가를 하는 부분에 있어서 주위 건물과 잘 어울리는지 등도 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하니까 이럴 수도 있겠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와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두 주인공(남 : 마틴, 여 : 마리아나)은 도시속에서 스쳐 지나가듯 가버린 인연과 같다. 현대사회란 그런게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도, 내가 도심속을 걷다보면 스쳐지나가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명이 영화의 마지막처럼 '아는이'가 될 수도 있는것이다. 단지 미래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일뿐, 내 삶도, 주인공의 삶도 이렇게 우연속에서 서로를 만나고 지나치고 있었던것 같다. 영화의 매력은 바로 이런부분들이다. 영화는 군중속의 고독을 아주 정확히 포착해냈다. 이제것 그 어떤 영화도 이런식으로 고독과 소외를 포착해서 보여준 영화는 보지 못했었다. 몇번을 마주친다. 한번은 개가 건물에서 자살시도를 했을때, 두번째는 위에서처럼 그냥 횡단보도에서 지나칠 때. 결과적으로는 그 둘은 어떠한 공통점도 찾지 못하고, 어떠한 인연도 없이 나중에 채팅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쇼 윈도우를 통해 보여지는듯 한 삶,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한 삶이 된것 같다고 생각해본적 없었는지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아침에만 해도 수십번 고민을 한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고 가야하나, 어떤 느낌으로 가야하나, 가방은 뭘 가지고 가야하는지 등의 고민을 한다. 아이러니한건 이렇게 내가 보여지고 싶어하는 상황이 사실은 '소외'와 '고독'으로 둘러쌓인 삶이라는 것이다. 정말 격하게 공감이 갈 수 밖에 없었다. 난 이 학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의 감정을 느꼈겠지만, 유독 이 학교는 내가 요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이야기할만한, 믿고 말을 터놓을만한 사람도 부족하다. 그런 상황속에서, 내가 굳이 옷을 챙겨 입고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된다. 내가 누굴 위한 삶을 살 것도 아닌데, 나는 사실 나 좋으라고, 내 기분내려고 옷 입는게 좀 있긴 한데, 과연 그게 아예 타자화되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삶의 일부분은 분명 타자화되어 있을게 분명하다. 그런걸 영화는 '쇼윈도'라는 도구를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마리아나가 쇼윈도 안에 서있는 모습과, 마리아나가 잠시 들어간 사이 마틴이 쇼윈도를 보고 있는 모습, 저건 마리아나가 '마네킹'의 시선을 통해서 바깥을 보고 있는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마네킹 같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마틴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현대인의 이면을 영화는 '쇼윈도'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철학적인 도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Medianeras, sidewalls. 측벽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이 벽들은 건물에서 가장 쓸모없는 부분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는 저 벽면에 사람들은 위와 같이 창문을 만들어 생활하는 이가 이었다. 마틴과 마리아나 역시 저드로가 같이 벽을 둟어서 창문을 만들었는데, 이건 세상에의 통로를 만든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가장 쓸모없는 벽에 가장 받고 싶은 '햇빛'을 들여놓는다는것, 이게 의미하는건 '소외'와 '고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빛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다른 사람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교감하기 위한 출구일 것이다.
사실은, 저 부분만 딱 보니까 어떻게 sidewalls가 생겨먹었는지 독자들은 이해가 안될것 같아 다른걸 가져왔다. 바로 위 그림을 보면 저들이 뚫어놓은 창문 외에 창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창문이 없는 벽인데, 불법이지만 묵인된 창문인 것이다. 계획에도 없고 생각도 없었지만, 단지 필요에 의함을 넘어선, 주체적인 선택으로 뚫은 창문은 이 영화에서 서로가 먼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여담이지만, 난 영화 감독이 절묘한 위치에 촬영장소를 골랐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남성 속옷 광고중 가장 '상징적인'부분에서 살고 있고, 여자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 살고 있었다니, 이건 우연이 아니라 감독이 계획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정말 잘 찍었다.
남자친구가 어느날 너무나도 낯선사람으로 여겨지고, 헤어진 뒤 자신만의 '윌리'를 찾는 마리아나와, 여자친구가 잠시 간다고 하면서 맡겨둔 강아지를 같이 데리고 사는 마틴, 한쪽은 쇼윈도의 마네킹 디자이너를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마리아나는 자신의 머릿속 기억도 컴퓨터 휴지통을 비우는것처럼 한번에 지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과거 남자친구과의 기억과, 진정 '혼자'라는 외로움이 그녀를 괴롭게 한다. 나도 요즘은 가끔 방안에 혼자 있을 때 뭔가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데, 마리아나 또한 그런 감정을 수십번 느끼면서, 폐쇄공포증이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는 자신을 힘겨워한다. 관심있는 남자가 밥을 먹자고 했을 때도 건물이 너무 높아 밥을 먹으러 갈 수 없었음에 아쉬워 했고, 수영장에서 만난 괜찮은 남자도 결국 섹스 한번 후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회용품과 같은 인간관계, 마리아나는 그것에 대해 매우 속상해 하며 자신만의 '윌리'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못찾은 유일한 윌리, '도심속의 윌리'를 말이다.
이 둘을 연결하는 건 가장 현대적이면서 삭막한 '채팅'이다. 하지만 채팅도중 일어나는 정전과 함께 둘은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됨을 아쉬워하며, 근처 소상인 가게로 내려가 불을 붙일 수 있는 양초를 사면서 스치게 된다. 그렇게 스치지만, 서로가 방금 채팅중에 만났던 사람인 줄은 모르는, 가상에서는 가깝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도 먼, 현대사회의 일면을 감독은 날카롭게 보여준다. 그리고 난 뒤 다음날, 자신의 강아지와 같이 외출한 마틴을 창문을 통해 본 마리아나가, 자신의 '윌리'임을 확신하며 엘리베이터까지 타고 내려가 만나게 되며 영화는 마무리 짓게 된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적 요소로 파악하면서 분석한 해외 블로거도 있었는데, 난 사실 그런측면 보다는 굉장히 '소외'가 '고독'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요즈음 내 삶도 그다지 소통하는 삶인것 같지는 않아서 그런것도 있고, 영화 초반부의 강렬한 이미지가 끝날때까지 지워지지 않아서 그렇기도 했겠다 싶다. 난 항상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를 모순적인 공간이라고 인식했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사람의 절대 수가 적어 몇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인게 싫다는 점, 너무 와전과 왜곡이 심하다는 점이 사람들과 가까워 지고 싶다는 마음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면 거의다 알게 되기 대문에 일회성인 관계가 늘어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심하고 고독하고 소외된 느낌이 든다.
복학하고 이제는 이 학교를 5년째 걷고 있는데, 하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건 애초에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였던걸 내가 너무 해결하려고만 접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좀 더 괜찮아 지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