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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곡동 롯데아파트의 기억개인적 기록/이사 기록 2022. 7. 26. 18:22
일곡동 롯데아파트는 제가 중3이 되기 전 해에 이사를 온 곳이에요. 저는 그 전까지 광산구의 월곡동 금호아파트라는 곳에서 살았어요. 그 전에는, 그러니까 유치원을 다니던 중의 저는, 백운동의 현대아파트의 조부모님 댁에서 지냈었는데 그때의 저는 월산동 성당의 성모 유치원에 다녔었고, 가톨릭 유치원의 분위기와 성당 아래에서 축복을 받으며 자라났어요. 저를 사랑스럽게 봐주셨던 신부님, 수녀님, 유치원 때의 선생님들 덕에 유년 시절은 잠깐의 단절이 일어났으나 그 단절을 이겨낼만한 무언가로 나중에 기억이 남은 것이었죠. 왜 그런 단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냐하면, 저는 어딘가가 익숙해지고 난 뒤에서야 이사를 갔기 때문이에요. 저한테는 이번에 떠난 일곡동의 롯데아파트가 그랬습니다.
일곡동 롯데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난 뒤 바로 전학을 가지는 않았어요. 광산중학교에서의 학기가 끝나기까지 얼마간의 날들이 더 남아있었거든요. 그래서 2월에 잠시 학교에 나올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집에 바로가지 않고 중학교 주변의 PC방들을 어슬렁거리며 집에 가는 시간을 늦춰만 갔습니다. 정든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중학교 2학년의 어린 저에게 결코 익숙한 일이 아니었으니 겁이 날만도 했었죠. 그것은 제가 광산구 월곡동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중학교 2학년의 곽수창이 어딘가에 발 붙일만한 곳이 월곡동 금호아파트 주변과 그 동네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월곡초등학교와 광산중학교의 기억들은 그렇게 제가 이사를 하면서 사라져가기 시작했어요.
일곡동 롯데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느꼈던 점은 첫번째로 집이 조용하다는 것, 아파트 바로 옆에 중학교가 생긴다는 것(물론 그 중학교는 내가 다니지 못했어요.) 뒤에는 산이 보인다는 것, 집 주변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 월곡동과는 다르게 학원이 많은 거리가 있다는 것, 전봇대가 보이지 않는 다는 것, 자주가고 싶어했던 패밀리랜드가 가까워졌다는 것 정도가 있었어요. 아, 하나 더 있다면 남자 사립 중학교로 전학을 갔다는 점까지 더할 것 같네요. 그렇게 전학을 간 살레시오 중학교 2학년의 교실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칙칙했다. 공립중학교보다도 오래된 건물에 들어온 느낌을 받았습니다. 광산중학교라고 해서 좋은 건물은 아니었지만 살레시오 중학교의 그런 낡은 철문과 높은 천장 같은 것들은 도저히 적응할래야 적응할 무언가가 아니었어요. 뭐 학교의 분위기 자체도 한 몫 했었겠지만. 먼지가 가득끼어있는 방충망과 어두운 분위기의 교무실, 여자 선생님이라고는 보이지 않던 학교의 분위기도 한 몫 했을지도 몰라요.
학교를 전학오고 나서 제가 느꼈던 첫번째 충격적인 장면은 바로 같은 반 학생들의 생활이었어요. 생활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남학생들만 있다보니 학생들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는 거에요. 공학에 있다가 넘어오니 그들의 외설적인 농담이나 행동들이 처음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너무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았죠. 다른 하나는 학생들의 공부였는데, 중학교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반에서 10명 이상은 하이레벨이라는 수학문제지 따위를 풀고 있었어요. 사실 '따위'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저에게 그 당시 '하이레벨'은 너무 어려운 수학문제지였어요. 감히 시도해볼만하지도 않았던 생각들로만 가득한 책들이었고, 처음 듣기도 한 그 문제지를 여러 명의 학생들이 쉬는 시간마다 학원 숙제라고 푸는 그 광경은 저에게 너무나도 어색함을 안겨다 준 동시에 위기감을 불러일으켜왔어요. 결국 저도 그 문제지를 사서 풀어보기 시작했어요. 쉽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또 못풀 것도 아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어느샌가 학교 분위기에 따라가면서 학원을 이곳 저곳 다녀보기 시작했어요. 당시에 그 동네 주변에서 유명했던 선경학원(정확한 이름 기억이 나질 않네요.)이라는 문흥동의 유명한 학원이나, 바로 집앞의 유치원 건물에 붙어있던 수학 학원은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고 용봉동과 일곡동 언저리에 있던 셔틀버스가 운행하는 종합 학원을 가고는 했어요. 그러나 실력이 오를리가 없었어요. 위에는 ECC영어학원이 있었는데 저는 ECC 때문에 그곳으로 간거였지, 밑에 있는 종로엠스쿨 때문에 간 건 아니었거든요. ECC에서 만나는 외국인들과의 짧은 이야기들은 나쁘지 않았어요. 그 당시의 학원 생활을 돌이켜보면 정말 아까운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어느정도의 수학 예습이나 영어 공부가 되었지만, 그러나 괄목할만한 그런 성과를 제가 보이지는 못했거든요. 시험에서도 특별히 열심히 하지도 않았어요. 우연하게, 학교에서 수학 과목만 100점 가까이(쉬운 시험에서) 나오고 나서는 수학을 아예 못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안도했던 기억들만 납니다. 이미 그때도 수학은 버리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위에서 했었는데, 그 도서관은 저에게 후일 고2~고3 공부의 모든 시작이 되었던 곳이었어요. 중3의 저는 시험기간에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도서관에 갔지만 공부가 잘 된 적은 없었지만요. 3층의 열람실에 올라갔지만 실제로 뜻깊은 시간을 보낸 곳은 2층의 도서열람실이었던 기억들도 가득합니다. 중3의 저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해요. 기것해야 아발론연대기와 같은 책들을 읽었던 기억, 열국지는 고등학교 가서 읽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책을 많이 보러 갔던 기억만 납니다. 그래도 그 책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소중했어요. 돌아보고 나면 그때 만큼 책을 다시 접하게 된 계기가 대학에 가서였으니까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어볼 공간의 기회가 생긴다는 일이 흔한 일이 아닌거죠.
중학생의 짧은 기간동안 자주 간 놀이터는 오락실이었어요. 아버지가 대학교수라는 친구와 자주갔던 그 오락실은 집으로부터 멀리 아래 학원가의 뒷골목 어딘가에 떨어져있었어요. 지금은 그냥 평범한 가게로 바뀌었지만, 저는 그 오락실에서 제가 일곡동으로 이사오기 전부터 했었던 리듬게임을 했습니다. EZ2DJ라는 리듬게임이었는데 그 리듬게임은 제가 유일하게 이사오고 나서도 과거를 기억하는 하나의 수단같은 놈이어서 집착을 보였던 것 같아요. 단계를 올려가며 하나하나 뚫어보자고 마음을 먹고 했던 것이 그 게임이었어요. 저는 그 게임을 특출나게 편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못하는 편도 아니었어서 나름대로의 실력 향상을 해가면서 게임과 학원을 같이 했어요. 그리고 학원이 끝나면 항상 동전노래방에 들어가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나요. 당시의 저는 여전히 버즈의 노래를 자주 불렀고 친구는 제가 살면서 처음 들어보던 90년대의 노래를 어디에선가 찾아 들고와 불렀어요.
그렇게 중3의 나는 어느덧 학교 부적응과 적응을 왔다갔다 하면서 학교를 마쳐갔어요. 한편으로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구요. 진학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고 계셨던 어머니께서는 당시 저에게 간디학교를 권하기도 했었는데, 간디학교는 산청에 있던 대안학교로 인가를 받았지만 전혀 다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그런 곳이었다는 것 정도만 알았어요. 중3으로 올라가던 해 겨울방학에는 호주로 한달 동안 어학 연수 같은 걸 보내주셨는데, 그때 연계했던 곳이 간디학교였어요. 간디고등학교는 학비가 학기당 200이상은 든다는 곳이었는데 결국 저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게되고 그렇게 진학한 곳이 집앞의 살레시오 고등학교였습니다. 중학교 바로 옆에 붙어있던, 정확히는 한 건물의 일부가 중학교였고 또 다른 일부는 고등학교였던 그곳에서 3년을 더 보내게 되었어요.
중3에서 고1로 넘어가던 시기의 저는 딱히 열심히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수학 선행도 제대로 안했어요. 어느 여럿 중3~고1처럼 PC방에 자주갔었고. 전학을 오고나서 성적이 조금 떨어지긴 했으나(백분위 90%->80%) 그건 그렇게 문제될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어요. 과학고나 외고를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지만, 그런 생각은 누구나도 갖고 있었어요. 그에 비해 제가 스스로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못찾은 채로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제가 들어간 학원 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국어 학원을 다니는 것이었어요.(당시에는 '언어'라고 불렀어요.) 윤동권이라는 언어 전문 학원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그 학원이 사라져버렸지만. 어찌되었든 저는 그곳에서의 국어 수업을 지긋하게 들었어요. 한달에 20만원이나 하던 그 학원은 수업 시간도 다른 학원에 비해서 적어서 저는 '비싸다'라는 인식과 함께 학원을 다녔어요. 그러나 그 덕에 저의 언어 성적은 2등급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고2때까지 어떻게 보면 버리지 않고 학원을 다닌 게 나름 나쁜 일은 아니었어요.
그런 과정들 사이에서 유독 기억나는 것은 두 가지의 일들이 있었어요. 둘다 학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는데, 하나는 살레시오 여고를 다니는 학생이었는데 집이 이 근처가 아님에도 일곡동까지 굳이 와서 학원을 다닌다는 것이 신기했어요. 버스를 타던 부모님이 데려다주시던 20분은 족히 걸리는 시간인데, 매번 부모님이 데리러 오시던 그 모습이 신선했어요. 다른 하나는 그 곳에 온 수학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 수학 선생님의 외형은 뚱뚱한 모습밖에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분에게 수학 수업은 딱 두 번인가 한 번인가 들었던 것 같은데, 그 뒤로 그 선생님의 수학 수업을 듣지 못했음에도, 평생 기억에 남을 수학 수업을 그분에게서 들었어요. 그 때의 수학 수업은 가장 재미있었던 수학 수업이었고, 저에게 수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수업임은 분명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 후 3등급과 4등급을 전전하던 당시의 저에게는 그 선생님의 수학 수업 이후로 수학을 잘하고 싶다는 이상한 의문이 들게 만드는 그런 수업이었죠. 500만원짜리 개인과외를 한다는 이야기에 넘어갔던 것인지.
고1의 생활이란 중3의 생활과는 다른 무엇이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야자였어요. 야자하고 나니까 9시 40분인가 50분엔가 학교가 끝이났습니다. 밤새 할 것이 없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야자 시간에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고1 때의 담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는데(후일 대학 입학 때 뜻하지 않게 도움을 주게 된 분이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반 애들과의 관계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던 기억도 납니다. 학생들이 많이 무례했어요. 그 담임 선생님은 나중에 알고 보니 대학 입학 때, 교수님과 같이 공부했던 분이었어요. 작문을 가르치시던 박교수님이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을 언급할 때, 뭔가 신기했어요. 아마도, 살레시오고등학교라는 학교가 저에게 준 하나의 충격? 비슷한 것이었겠죠. 생각보다 고등학교 때의 일들도 대학생의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겠구나 라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이었어요.
살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공부'라는 변화라는 건 고민의 여지가 없어요. 왜냐하면 저에게는 그 공부 덕분에 만나는 사람들을 한 번 바꿀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정확히 저는 고2 여름방학 즈음부터 공부란 것을 제대로 했어요. 공부의 이유는 학생회를 하던 다른 친구들과 비슷한 성적을 만드는 것에 있었어요. 학생회 소속의 학생들이 다들 잘하는 사람들이었어서 그랬던 것이죠. 고1때도 학생회를 했었지만 그때에는 성적에 대한 어떤 불안감? 이런게 없었는데 정확히 두번째 학생회때는 그런 감정과 위기감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피어났어요. 그게 저에게 공부의 시작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열등감으로부터 시작했구나 이런 생각은 들어요. 아들러가 말했던 성장의 원동력이 열등감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미 이 때 깨달았네요.공부와 시작과 동시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서관에 가는 것이었어요. 독서실을 그 전에 몇 번 가보았으나 저에게 독서실은 공부의 장소로는 부적절하다고 느꼈어요. 많이 답답했어요. 이름은 집현전이라고 쓰여있는 독서실이었지만 저에게는 집현전이 아니라 수면실이 아니었을까 싶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다니기 시작한 도서관은 역시나, 처음에는 잦은 '책읽기'로 스트레스 해소가 시작되었어요. 그러나 저에게는 시간이 부족했어요. 하루 빨리 고2의 수학을 넘겨 고3에 필요한 성적을 만들어내야만 했고,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게 수능이 약 1년이 더 남은 시점부터 였을거에요. 1년이 더 남은 시점의 여름방학에 도서관에 발을 붙여보고나니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동네에는 정말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도서관이 아침 7시부터 문을 열면 나는 9시 전까지는 가려고 노력했던게, 7시면 공인중개사를 공부하던 어르신도 있었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학생들도 들어왔던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중에는 같은 학교 3학년 선배도 있었는데, 조상아라는 선배가 있었어요. 가톨릭 신자여서 일요일 아침에는 늘 성당에 갔다오는 모습, 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 3학년 선배의 모습은 저한테 귀감이 되었어요. 지금 고대 경영가서 어딘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후 저의 고3 생활은 별다른 게 없어요. 어느 열심히하는 고3처럼 살았습니다. 일찍 도서관에 가서 늦게까지 오는게 매일매일의 목표였고, 그것을 지킨 날에는 어김없이 밤하늘과 떠있는 달을 쳐다보면서 왔어요. 그 당시의 저는 내신공부가 너무 어려웠는데, 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외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민들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인강을 듣는 일 만큼은 그래도 재미있는 일이었고, 특히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은 더 재미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알려주지도 않는 세계지리나 경제지리를 찾아 듣고 싶었던 게 고3때의 저라는 기억은 나요, 그 와중에 지리 올림피아드인가 나가보겠다고 발악한것도 고3 때의 저였습니다. 수험생활 중에서 운 좋은 게 몇 가지 더 있었다면 그 당시의 문과 수학은 딱 수열과 극한 일부까지였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수학 1등급이라는 것은 저에게는 어렵지 않은 목표였다는 거에요. 심지어 어린 시절에 한 게임 덕분에 제가 갖고 있던 수열 추리 능력이 기가 막힐 정도였고, 문제를 보면 수열이 떠올라 식으로 옮겨낼 수 있는 힘 같은 게 있었다는 걸 문제풀면서 알게 되어서, 시작은 늦었어도 수학 때문에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아이큐 검사를 했던 검사지에서는 수열 추리 능력의 백분위가 99퍼였으니까 저는 수열만 놓고 보면 상위 1퍼센트의 능력을 갖고 있었던 셈이었죠. 그렇게 고3때의 저는 공부로 올인했어요. 물론 군데군데 일탈 같은 것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저의 모습은 공부를 열심히 한 고3이었어요. 기숙사에 안들어가겠다고 박박 우기며 성적을 올리겠다고 한 스스로의 모습을 부모님에게, 제 자신에게 입증해야만 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선택한 사회탐구 과목에서도 입증을 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그런걸까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고, 고1이나 고2때의 성적과는 다르게 국어와 수학을 1등급이 나오기 시작하며 저의 삶은 바뀌었을 뿐이에요.
공부로 인해서 저의 삶이 바뀐 가장 큰 이유는, 공부를 통해 제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수능 성적이 제 기대보다는 낮았지만, 제 삶에서 보면 낮지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 만나게 된 친구들도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이었고, 그렇다보니 그들의 삶이나 대화하는 방식, 사고 구조 등에서는 얻어갈 게 많았어요. 그렇게 교원대 대학생활을 했고, 이후 돌아온 광주에서의 삶은 그럭저럭 흘러갔어요.
나주에 취직을 한 이후의 일곡동에서의 삶은 크게 두가지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하나는 집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던 기억이 있어요. 부모님 두분이 해남으로 내려가시게 되고, 동생과 둘이 살다가 어느날 동생마저도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던 그 날, 저는 살면서 집을 떠나오기만 했다가 집을 지켜보는 경험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어요. 그게 아마도, 저의 첫 ‘집’에 대한 색다른 기억이 아닐까 싶어요. 출퇴근이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집에서 사는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일곡동에서 취직 이후의 첫 2년을 보냈으니 그 집을 떠나게 된 저의 기분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복잡해요.
다시 그 집에 돌아가라고 하면, 아마 돌아가보긴 할 것 같아요. 그 집에서의 기억이 좋은 것만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쁜 기억들도 많이 없어요. 오히려 저에게는 광산구에서만 살았다면 경험해보지 못했을 새로운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한 곳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시작된 곳이라고 의미부여를 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좋은 기억들이 상당히 많아요.
쓰고 나니까, 교원대에서의 기억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요. 책으로 쓰다가 만 부분들이 있던 것 같은데 시간이 나면 잘 정리해서 글로 또 올려야겠어요.
공간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는 건 늘 필요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