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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에로스와 타나토스인데, 음......갑자기 세계문학전집에서 예술계열 책으로 장르를 옮긴건 '안나 카레리나'를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나 카레리나 3권을 끝내 반납하지 않아서 오늘까지도 난 그 책을 빌릴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자살'로 끝맺음을 한 '소피의 선택'을 뒤로 하고 다른 뭔가를 찾아야만 했는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나, '노트르담 드 파리'혹은 '죄와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등의 책을 생각했다. 다만 이 책들은 당장 내가 읽기에는 애매한 길이였고, 빌려놓은 '이성과 감성'을 몇장펼쳤지만 제대로 집중도 안되고 재미도 안붙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책을 빌리게 됬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다른말로 하면 '사랑과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감정인 '사랑'과 모든 사람이 결국은 '죽음'을 향해서 가고있다는 가정을 보았을때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읽었던것처럼 사랑을 하지만 그 순간에도 죽음은 한순간한순간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콘스탄틴 레빈만 해도, 사랑에 빠져서 키티와 결혼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형인 니콜라이 레빈이 죽음의 바로 직전에 이르고, 형을 만나고 나서 형이 죽음을 맞이하는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복합적인 층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안나 카레리나'에서 보여주는 그런 사랑과 죽음은 아니고, 사랑의 극단이 결국은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유디트'와 같은 작품이나,(유디트라는 이름의 작품은 매우 많다.) '삼손과 데릴라', '나르키소스', '다나에'와 같은 작품들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하나하나 설명해가는 작가의 능력은 대단하긴 하지만 에로스와 타나토스라는 용어와 기원자체가 그리스 로마신화와 라틴어에서 비롯됬다는것을 생각하면 이는 아시아권 신화에는 조금은 적용되기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숙영낭자전이나, 운영전과 같은 한국의 고전소설도 대개 '사랑'에 빠져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경우에까지 갔으니까, 이건 어찌보면 인류공통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인상깊었던것중 하나는 '뭉크'의 이야기였는데, 이 책에서는 뭉크의 삶을 간단하게 조명하고 그에 대한 '팜므파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는 자신의 유년을 배개와 병상과 이불의 나날이었노라고 회고했다. 따라서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을 경험했다. 진정한 탄생, 즉 죽음이라는 존재가 다시 나를 기다린다"는 그의 고백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그는 가장 무서운 인간의 적 두가지, 즉 패결핵과 정신병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았다면서 극도의 피해의식을 노출했다.
반복된 유년기의 죽음 체험은 자연스레 죽음과의 친밀도를 강화시켜 어쩌면 그것의 공포와 강도를 약화시켰을 수 있었으리나. 그러나 죽음과의 대면에서 그 지독한 두려움이 완화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히려 죽음은 그의 주변을 서성이며 자주 그를 괴롭혔다. 그는 죽음을 응시함으로써, 아니 직시함으로써 삶을 통찰해야하는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은, 여성을 죽음을 환기하는 우울한 이름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약하자면 여성은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면서 죽음을 환기하는 일종의 공포였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바로 그것이다.
그의 첫 여성 체험은 3세 연상의 보헤미안 성향이 강했던 헤이베르그부인이었다. 연상의 유부녀, 더구나 지독한 보헤미안, 해군 군의관의 부인으로 알려진 그녀는 보헤미안 운동을 지지한 자유분방했던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가 뭉크의 첫사랑이었다는 것은 장차 그의 애정이 순탄치 못하리라는것, 여성관이 처음부터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고하는 것 같다. 그녀는 첫사랑의 설렘이나 호기심보다 육체적 관능의 세계로 그를 인도했고, 다소 방탕한 애정행각을 유도했다.
뭉크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그녀에게 바치고 싶을 정도로 그녀의 강한 매력앞에 복종했다. 넋을 빼앗겼다. 그녀는 뭉크의 모든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는 강한 독성을 지닌 매력을 소유했던 것이다. 전방위적으로 돌진해 오는 그녀의 관능적 자극에 사랑의 문외한이었던 뭉크는 속수무책이었다. 반대로 자유연애를 즐겼던 그녀는 사랑의 초보자인 뭉크로부터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 실패했다. 그 사랑의 허기와 갈증이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대상을 탐닉케 했을 것은 자명했다.
뭉크가 이렇듯 처음부터 '팜므 파탈'에 빠져버리는것은 운명의 장난일까. 그녀의 그림이 대개 절망적이고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 놓인 그림이라는걸 생각한다면 그에게 '에로스'는 '타나토스'로 이끄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죽음과 고통과 비탄을 불러온다면 이건 굉장히 앞으로의 뭉크가 불행해질것임을 어느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한번은 보헤미안을 사랑하고, 다른한번은 자신을 지나치게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불행해지는 뭉크도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을테지만, 딱하기만 하다.
'다나에'이야기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다나에는 탑에 갇혀서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지닌 여자였다. 그런 다나에를 관심가지는 남자가 한명있으니 그게 바로 제우스다.(하 어찌도 제우스는 이리도 여자들을 많이 홀리고 만난단 말인가...) 다나에는 탑에 갇혀 자신의 그 어떤 욕망도 풀 방법이 없던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누군가가 바로 신이었고, 제우스는 '빛'으로 변해서 다나에와 성적결합을 한다.
황금빛에 둘러쌓여 황홀한 표정을 짓고있는 다나에, 이 작품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이다. 손과 표정 그리고 높이 쳐든 허벅지를 통해 제우스와 교감하고 있다는걸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하지만 이건 동시에 그녀에게 있어 여전히 '타나토스'적인 요소를 남겨둔다. 탑에서 그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는데 딸이 배가 불러 임신을 하면 과연 이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래서 다나에의 아버지는 아크리시우스는 다나에를 다시 바닷가로 아들과 함께 돌려보내는 것이다.
항상 신화이야기는 날 흥미롭게 하는건 맞다. 이번에도 그랬지만 책이 처음에 약간 붕 뜨는 느낌은 읽는 내내 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점점 내가 서양미술개론 시간에 한번씩 보던 그림이 나오고, 그에 대한 수업도 생각나고 신화도 떠오르고 하다보니까 읽었던게 아니었나 싶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