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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이트 전집 나르시시즘 서론 part.2
    2013. 1. 12. 23:15

    나르시시즘 서론 Part. 2

     

     

       나르시시즘 연구에 어떤각별한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 방법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나르시시즘에 접근하는 주요 방법은 아마도 이상 정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전이 신경증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가 리비도적인 본능 충동(Triebregung)을 추적할 수 있었듯이, 조발성 치매나 편집증을 통해 우리는 자아 심리학(Ichpsychologie)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정상적인 현상에서는 그렇게 단순한 듯 보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또다시 우리는 왜곡과 과장으로 점철된 병리학 분야에 기댈 수밖에 없다. 동시에 나르시시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얻을 수 있는 다른 접근 방법들도 있다. 여기서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기질병(器疾炳)에 대한 연구, 건강염려증에 대한 연구, 그리고 남녀의 애정 생활에 대한 관찰 등의 순서로 논의하고자 한다.

     

       기질병이 리비도의 분배에 미치는 영향력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페렌치가 구두(口頭)로 제시한 제안을 따르고자 한다. 신체 내장기의 통증과 불쾌감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은 외부 세계의 대상이 자신의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 그 대상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또 우리 역시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좀더 면밀한 관찰을 통해 우리가 알아낸 것은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도 관심을 철회한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당하는 동안엔 사랑을 중단하는 것이다.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자산의 리비도를 자아로 집중시킨 뒤, 병에서 회복되면 다시 그 리비도를 밖으로 발산한다. 치통으로 고생하던 시인 빌헬름 부슈(Wilhelm busch)는 <어금니의 그 좁은 구멍안에 내 영혼이 집중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의 리비도와 자아에 대한 관심이 같은 운명이고, 또다시 서로 구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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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단 프로이트 나름대로 이 나르시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뒤에가서 보면, 나르시시즘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 알게 될것이다. 뭐, 개인적으로 마지막 부분의 결론은 충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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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감정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몸이 병으로 아프게 되면 그 감정이 사라지고 대신 무관심과 냉담함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은 희극작가들이 적절한 수준에서 주요 테마로 활용하고 있는 심리의 흐름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는 수면의 상태 역시 질병과 흡사하다. 수면도 리비도를 자아로 후퇴시키는, 더 자세히 말하면 잠자고 싶은 욕망으로 끌어들이는 나르시시즘적 리비도의 발현을 보여준다. 꿈의 이기주의가 이런 맥락에 잘 어울린다. 아무튼 두 경우에서 우리는 자아의 변화로 일어나는 리비도 분배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예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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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수면의 상태와 비슷하다는 결론을 맹신하지는 않는다. 일단 내가 납득이 안되니 말이다. 그런다고 해서 프로이트의 의견을 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리비도의 행방유무가 분명 나르시시즘 해결에 중요한가 될거라고 프로이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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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단순히 앞에서 논의한 그런 시각에서 보면 건강 염려증과 이상 정신의 관계가 신경 쇠약증이나 불안 신경증과 같은 다른<실제적> 신경증과 히스테리나 강박 신경증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고 언급할 뿐이다. 말하자면 다른 신경증들이 대상 리비도에 의존하듯이 건강 염려증은 자아 리비도에 달려 있으며, 자아 리비도에서 비롯된 건강 염려증에 의한 불안은 신경증에 의한 불안과는 상대적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전이 신경증에서 병에 걸리고 증상이 나타나는 메커니즘 - 내향성에서 퇴행으로 이어지는 과정 - 이 대상 리비도의 억제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자아리비도의 억제라는 개념에도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며, 또한 그 개념을 건강 염려증이나 이상 정신 현상과 연결지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와 같은 자아 내의 리비도의 억제가 왜 불쾌하게 느껴지는가 하는 의문을 당연히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불쾌한 느낌이란 평소보다 높은 정도의 긴장감의 표출, 바꾸어 말하면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일정한 양의 물리적 현상이 불쾌라는 심리적 성질로 변환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그렇지만 불쾌감의 발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물리적 현상(사건)의 절대적인 크기(양)가 아니라 그 절대적인 크기가 갖는 어떤 특정의 기능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삶이 나르시시즘의 한계를 넘어 리비도를 어떤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가 얻어낸 문제해결의 단서는 자아로의 리비도 집중이 어느정도의 수준을 넘어설 때 다른대상으로 리비도를 향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가 얻어낸 문제 해결의 단서는 자아로의 리비도 집중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넘어설 때 다른 대상으로 리비도를 향하게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강한 이기주의는 병에 걸리는 것을 막아주는 하나의 보호막일 수 있다. 그러나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엔 사랑을 해야 한다. 만일 어떤 좌절 때문에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하이네(H.Heine)가 세게 창조의 심리적 발생론을 언급한 다음과 같은 시구에도 나타난다.

     

    질병은 모든 창조적 욕구의

    궁극적 근거.

    창조하면서 나의 병이 나았고

    창조하면서 나는 건강해졌네.

     

       우리는 불쾌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질병을 원인이 될 수도 있을 자극이나 흥분을 극복하도록 만들어진 최고의 장치가 우리의 정신 기관이라는 사실을 깨달앗다. 이상 정신자의 경우, 자아로 돌아선 리비도에 대한 그 비슷한 내적 처리 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과대망상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 내의 리비도가 억제가 병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우리에게 병에 걸렸다는 인상을 주어 회복의 과정을 밟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과대망상이 무너졌을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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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뇌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통제하는 기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뇌가 환각상태에 빠져있을때, 우리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예를들어, 뇌는 지금 운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몸도 똑같이 반응한다. 실제로 몸을 움직이지 않더라고, 호르몬분비와 같은 생리적인 현상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소위 마인드트레이닝(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도 한다.)이 이 뇌의 '바보같은 성질'을 이용한 사례라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는 동안, 몸이 그 상황에 따라가는걸 적용함으로서, 훈련하는 것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의 사전적 정의는  올바른 기술따위의 습득을 위하여 머릿속에 그 운동이나 동작을 그려보는 연습법.' 이라고 되어있다. 우승하는 상상을 해오던 선수가 더 우승할 확률이 높은 그런 마법같은 트레이닝이다.^^

       오죽하면, 우리의 신경작용이 과연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건지, 아니면 뇌에서 발현하는 호르몬,신경체계를 통해서 발현하는건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심리학과 뇌의학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고 말한 '송현석' 교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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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남성들에게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나르시시즘적인 여성들의 경우에도 온전한 대상 사랑으로 향하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아기를 낳게 되면 자신의 신체 일부가 낯선 외부의 대상으로 여겨지며, 따라서 자신의 나르시시즘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낳은 아기에게 온전한 대상애를 다 쏟아 부을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아이를 낳기 전에 (2차적인) 나르시시즘에서 대상 사랑으로 발전해 가는 단계를 취하는 여성들도 있다. 그들은 사춘기가 되기 전에 남성성을 느끼며, 또 어느 정도는 남성의 성장 단계를 따라 성숙해 간다. 여성으로 성숙해지면서 그런 남성성의 추구가 중단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남성의 이상형 _ 이 이상형은 그들이 한때 간직했던 소년 취향의 본성이 그대로 살아남은 것이다 - 에 대한 갈망을 여전히 보유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대상 선택으로 나아가는 길에 대한 간략한 개관으로 지금까지 내가 암시적으로 언급했던 것을 종합한 내용이다.

     

       어느 한 사람의 사랑 대상은 다음과 같이 나타날 수 있다.

       (1) 나르시시즘적 유형인 경우

    (a) 현재의 자신(그 자신).

    (b) 과거의 자신.

    (c) 자신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

    (d) 한때 자신의 일부였던 사람.

     

       (2) 부모 의존 유형인 경우

    (a) 자신에게 젖이나 밥을 먹여주는 여자.

    (b) 자신을 보호해 주는 남자.

       그리고 (a)나 (b)의 역할을 대신해 주는 여러사람들.

     

       우리 리비도 이론의 전제 가운데 하나인 어린아이들의 근원적 나르시시즘은 직접적인 관찰보다는 다른 관점에서의 추론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쉽다. 자식들에 대한 부모들의 애정 어린 태도를 보면 우리는 부모들의 그런 태도가 그들이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던 그들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다시 부활시키고 재현시키는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대상 선택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미 나르시시즘의 징후라고 인정했던 부분, 즉 과대평가에 의한 대상에 대한 신뢰가 그들 부모들의 정서적인 태도를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아주 완벽한 존재로 여기는 충동 - 자식을 냉정하게 관찰하지 못하는 - 에 사로잡히게 되며, 자연히 자식의 모든 결점을 감추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된다. 더욱이 그런 부모들은 자식들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경우는 스스로가 지닌 나르시시즘적 태도를 억제하면서까지 어쩔 수 없이 존중해 왔던 전통문화의 습득도 자식들에게는 유보하며, 그들 스스로가 오래전에 포기했던 모든 특권을 자식에게 다시 부여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말하자면 자식은 부모보다 더 좋은시대를 누려야 하고, 부모들 입장에선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것들에 자식이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질병이나 죽음이 자식들에게 닥쳐서는 안되며, 재미있게 못놀게 하거나 기를 꺾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연의 법칙이나 사회적인 법칙의 적용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진정으로 다시 한 번, 우리 스스로도 한때 즐겁게 누렸던 지위였던 <아기 폐하His Majesty the Baby>의 지위를 자식이 누려야 하며, 자식이 모든 존재으 ㅣ중심이며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뤄야 한다. 이 모든것은 현실의 압박을 심하게 받아 자아의 불멸성이 위협을 받는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자식에게서 피난처를 찾아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너무나 감동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치한 속성을 지닌 부모의 사랑이란 결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대상애로 변모되어 그 과거의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살아난 부모의 나르시시즘,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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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적인 결론이다. '부모의 사랑 = 나르시시즘의 부산물'이라는 말인데...내가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지만, 몇가지는 프로이트의 입장대로 생각했을때 납득할 수 있었고, 몇가지는 의문점이 들긴 했다.

       유진누나는 부모의 사랑이 나르시시즘의 일부라는걸 어디에서 들었다는데..(ㅡㅡ;;)정말 대단하다...난 이제서야 알았는데 말이다. 대부분의 정신분석학 책들이 결국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낸다는걸 말하는게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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